[트윗 갈무리] 일베, 역설적 전위

잉여와 오타쿠를 넘어서에 이어 적은 두 트윗타래 정리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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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현재가 심오한 의도와 안정된 필연성에 의거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역사가들에게 이에 관해 우리를 설득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 감각은 우리가 기원적 지표도 좌표도 없이 무수히 많게 잃어버린 사건들 속에 산다는 것을 인정한다.” – 미셸 푸코, [니체, 계보학, 역사]

01. 계몽(주의)의 극한을 알리는 나팔수

“이 학생의 주장에서 만나게 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정치에 냉소적인 것이 문제였다.” – 엄기호, 20대는 왜 투표하지 않게 되었나

“그러나 오히려 일베는 이런 보수·진보 또는 좌·우의 피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문순표, ‘진격의 엘리트’인가, 게토에 갇힌 넷난민인가?

“한마디로 일베가 계몽주의의 극우적 변종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 에오, 재난 이후의 계몽주의와 광신주의

한윤형의 책에 대한 박상준선생의 독해는 일베가 계몽주의 담론 이후, 아니 그것의 내파(implosion)에 해당한다는 내 생각-과 이에 대한 에오님의 동의-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 horschamp(@transdescendent)

엄기호 씨 글에서 ‘탁월함’의 예로 ‘웹툰’이 언급됐는데, 이는 물론 이말년을 위시한 ‘병맛 웹툰’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김수환 씨의 [웹툰에 나타난 세대의 감성구조: 잉여에서 병맛까지]와 같은 논지.(김수환 씨의 글은 책 [속물과 잉여]에도 실려있다.) 그러나 이후 [미생]의 등장으로 상황은 일변한다.

“적어도 <미생>의 경우엔 국민 웹툰이라는 수식어가 과장된 수사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다르게 말해, 적어도 이 작품 이후로는 웹툰 매체의 주변성이나 ‘세대론적’ 독자성을 말하기 어려워졌다.” – 김수환, <미생>이 판타지라고? 아니, ‘불가능한’ 성장 소설!

그리고 이것은 [미생]이 드라마화 되며 나타난 신드롬이 우여곡절 끝에 ‘장그래법‘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어느 정도 예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김수환 씨의 처음 글에서 병맛 웹툰은 “냉소와 유희의 힘”으로 다뤄진다. 여기서 한국의 잉여-주체와 일본의 오타쿠-주체를 비교하며, 그 차이를 “텍스트를 대하는 감정적 태도, 즉 ‘몰입 대 이화’로 갈리는 화용론적 태도”로 분석한다. 요약하자면 오타쿠-주체=데이터베이스 소비 주체(아즈마 히로키)=몰입이라면, 잉여-주체=이화, 즉 “온 힘을 다해 감정이입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이 “자기투영적 형태의 냉소”가 20대, 혹은 청년 세대의 언어로 말해지는 ‘탁월함’으로 여겨졌던 것. 그런데 ‘냉소’라는 키워드를 놓고 본다면 오타쿠 주체 역시 ‘시니시즘’의 적자다. “철저한 시니시즘의 자세“야말로 오타쿠의 특징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들은 “무관심하고 무의미해보이는 것에 몰두”한다.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오타쿠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의미 있는 것에는 무관심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 몰두”하며, 동시에 “자신의 관심 영역에 속하는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심한 냉소적 반응을 보이며 거리를 두는 태도를 취하는 점”. 아즈마 히로키 역시 유사하게 말한다. “90년대의 오타쿠계 문화를 특징짓는 ‘캐릭터 모에’란 사실 오타쿠 자신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단순한 감정 이입이 아니라 (…)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상대화하는 기묘하게 냉정한 측면이 감추어져 있다.”

오타쿠와 잉여를 가르는 “몰입과 이화”라는 구분법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다. 그러나 기실 김수환이 참고한 아즈마 히로키부터가 (아즈마 히로키가 참고한 오사와 마사치를 이어받아) 오타쿠-주체가 단순한 “몰입”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타쿠적인 이야기 소비=허구 중시는 “소비사회적 냉소주의가 철저화된 형태”인 것이다. 즉 “내셔널리즘적으로 회수당하는 함정 (…) 그 함정으로부터의 감성적 반발이야말로 오타쿠의 실존적 출발점“이었던 것이고, 그것이 ‘반발’로 작용하길 그만두고 역으로 기존 체제에 회수당하는 것이 현상황(“현재의 오타쿠들은 정치적으로 무해한 사람이 되려 하지만, 자신의 판단력이 없으면 특정한 입장의 대변자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 오쓰카 에이지)이다. 그렇다면 이때 오타쿠와의 대비를 통해서 극적으로 부각되는 잉여-주체에서 ‘탁월함’이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도 같이 허물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김수환 씨는 웹툰을 세대론적으로 논의하려는 것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미생에 관한 글 말미에서 여전히 (최태섭의 [잉여사회]를 경유해) ‘잉여-주체’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는다.

다소 막연해 보이는 이 기대감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라도 김수환 씨가 그다지 철저하게 분석해내지 못한 오타쿠와 잉여의 비교를 각각 따로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결론을 당겨말하자면 내가 보기에 “몰입과 이화”라는 키워드만 두고 볼 때 두 주체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두 주체는 모두 일반적으로는 무의미해보이는 것에 이상할 정도로 몰입하며, 심지어 그것을 자기정체성(동일성)의 근원으로 삼는다. 동시에 그것과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그 간극을 향유한다. 이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태도이다. 다시 오사와 마사치를 끌어오면, 오타쿠의 몰입은 얼핏 가상으로의 도피(몰입과 이화 중 몰입)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현실로의 도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수환 씨의 오타쿠 분석은 결정적으로 실패(“병맛 웹툰은 오타쿠를 위한 라이트노벨이 될 수 없다” 운운)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 자연히 잉여에 대한 기대감 또한 다만 막연해질 수밖에 없다. “몰입과 이화”가 주체의 태도에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 김수환 씨의 주장이지만, 정작 논문에서 얘기되는 건 텍스트 그 자체다. 오타쿠가 보는 텍스트는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텍스트인 반면, 병맛 만화는 온 힘을 다해 감정이입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꾸로 잉여들이야말로 이화를 유도하는 작품에 몰입하고 열광하고 있는 것이고, 오타쿠는 그 반대로 몰입을 유도하는 작품을 두고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 다시 ‘현실로의 도피’라는 현상을 살펴보자. 몰입을 유도하는 작품 앞에서 이화 작용을 일으키던 오타쿠들이 아이러니의 간극을 상실하고 ‘현실로의 몰입’을 하는 반면, 애초부터 “일종의 좌절된 소비“주체였던 잉여들의 몰입은 ‘현실로의 몰입’으로 보기 힘들다.

‘현실로의 몰입’이란 달리 말해 ‘리얼리티에 대한 갈구’이다. 이것은 일본전후사라는 틀을 벗어나 자본주의의 무한성이라는 환상이 깨진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강제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는 한국에서도 맥락은 다를지언정 저성장 시대에 따른 성장 불가능성 테제 등으로 표현됐다. 즉, “체제로의 편입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시대의 문제다.

이때 한국에서 ‘리얼리티에 대한 갈구’는 일본과는 달리 애니메이션, 게임을 향한 몰입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 조선일보의 ‘달관세대’ 기사에 대한 반론들에서 드러났듯이, 한국과 일본 사회는 여기서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여러 평자가 지적했듯, “일본의 ‘사토리 세대’가 한국의 ‘달관 세대’로 오는 것은 현 시점에선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잉여들이 가상에 몰입할 때, 그 몰입은 불현듯 깨지고 현실의 방해를 받는다. 해방은 그저 순간에 불과하다. 실제로 잉여-주체는 여전히 편입을 욕망하는, 하지만 그것이 좌절된 주체이기 때문이다.(“여기 잉여 하나 추가요~” 그 다음은?!) 이는 편입을 욕망하지 않기를 선택한 사토리세대, 그리하여 방해받지 않고 한없이 해방적 순간들에 잠겨 우회적으로 체제에 회수당하는 오타쿠-주체와는 다른 지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오히려 현실로의 도피가 ‘성과주체’, 혹은 ‘자기계발 주체’라는 양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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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설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자기정체성(동일성)’의 문제로 돌아가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 자기계발 주체는 이미 허구성이 드러난 성장서사에 온 힘을 다해 몰입하며, 그를 통해 리얼리티를 붙든다.

먼저 현재의 상황을 차분히 따져보자. 엄기호의 진단에 따르면, 이제 우리는 ‘일관된 서사를 통한 주체의 구성이 불가능'([단속사회])해져버린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즉 주체의 자기동일성이 위태로워졌다는 것이며, “‘나’라는 주체의 인격적인 동일성이 의심받게“(오사와 마사치) 되었다는 뜻이다. 원인은 무엇인가? 타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꿰뚫어볼 수 없는 타자의 상실‘ – 한병철, [투명사회])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동일성이란 본래 초월적 타자와 내재적 타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초월적이어야만 하는 타자의 내재화에 따른 초월성의 붕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정체성에 대한 회의의 극한에서 ‘자기계발 주체‘(서동진)가 탄생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타쿠는 일상적인 현실 속의 자기동일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환상적 세계에서 새롭게 획득하고자 한다. 이런 시도가 원천적으로 차단당했을 때, 일상적인 현실 속의 자기동일성을 계속해서 추구하려는 헛된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자기동일성을 찾는다는 건 이제 협의의 현실에서도 비현실에서도 모두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관된 진술이라고 보면,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은 좌절되고 마는 것이다. 이때 발생하는 현상이 바로 현실에의 몰입으로, 오타쿠는 냉소적 거리감을 상실한 채 “신경계를 직접 자극하는 듯한 강렬함…자해행위 중독”과도 닮은 행위에 빠져든다.
이것은 자기계발 주체에게서도 발생하는 현상이다. “오늘날 우리는 완전히 소진(Burn Out) 될 때까지 병적 쾌감으로 일에 파묻힌다. 번아웃 증후군의 첫째 단계가 바로 병적 쾌감이다.”(한병철, [“친절마저 상품이 된 시대, 혁명은 없다”])

그 결과, “시간적으로 지속되어야 할 인격적인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주체가 어느 한순간 의사를 표명한다는 것의 의미조차 극히 지엽적인 사실로 전락하고 만다.”(오사와 마사치) 이는 곧 정치의 작동불능을 가리킨다.

다시 잉여-주체로 돌아가보자. 잉여는 상당히 아슬아슬한 존재이다. 이들은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가상 공간에서 체제에 편입되길 꿈꾸지만 동시에 그것이 좌절됐기 때문에 비현실에 유배된 상태이다. 이들은 딱히 원해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우리는 디씨”라는 선언의 이면에 있는 불안“), 자기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다른 가능성으로 분출되어야 할 잠재태(에 불과하)다. 그 가능성이 부정적으로 실현된 것이 다름 아닌 일베라고 할 때, 어떻게 잉여가 일베가 되었는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자기동일성의 문제만 두고 볼 때, 일베는 일종의 전도된 ‘정체성 정치‘를 행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택광은 이것을 “현실을 지배하는 질서에 대한 거부라기보다 그 질서에 편입해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이라며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규정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반대로 일베는 바로 그 다음 지점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베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거나, 국가-아버지에 순응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일베는 편입의 욕망이 좌절된 지점에서 그것을 그 자체로 긍정하며 태어났다.

이들에게 모든 것은 ‘지엽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일베는 적극적으로 모든 초월론적 타자를 끌어내려 자신들과 동류인 내재적 타자, 특히 그 이상성을 상실하고 단지 모방가능성만을 간직한 “병신”으로 만들고자 한다. 일베의 행동 기제는 언제나 모든 것을 상대화의 지평 속에 내던진다는 것에 있다. 이들에게 초월적 타자란 언제든지 더럽혀질 수 있는 허약한 것에 불과하다. 심지어 인터넷 공간이란 협의의 비현실에 의탁해 벌어진 초월적 타자와 내재적 타자의 근접조우는 이제 현실에서도 무리없이 벌어질 수 있는 무언가에 불과하단 것이 폭식 투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런 의미에서 일베는 “속물의 정치“의 시대가 용해된 지점을 앞당겨 보여주는 중요한 참고자료이다. 이들은 말하자면 계몽의 극한=종언을 알리는 나팔수이며, 초월성의 추락을 위해 투구하는 역설적 전위다.

02. ~간주 중~

  • 01에서 말하려던 것 중 하나는 잉여는 그 자체로 주체가 아니라 다른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잠재태로서의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 그런데 이제 잉여가 바라는 그런 주체(“어제의 나와 같은 오늘의 나”)는 현실에서도 비현실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자는 자기계발 주체가 후자는 오타쿠가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불가능성을 ‘현실로의 도피’로 회피하거나 ‘사토리 세대’처럼 유예시킬 순 있겠지만, 일베는 그 모라토리엄기가 영원할 수 없단 것을 보여준다는 것. 모라토리엄기가 끝장나는 날, 거기선 당연히 “나만 아니면 돼”를 넘어, “내가 이렇게 됐으니 너도 당해봐라”는 ‘가학적 쾌락'(우치다 타츠루)에서 비롯된 ‘끌어내리기 민주주의'(마루야마 마사오), 극단적으로는 ‘리셋 욕망‘(엄기호)이 또아리를 틀게 된다. ‘리셋’의 가장 현실적인 버전은 물론 ‘저출산’ 따위가 아닌 전쟁이다. 혹은 보다 추상적인 버전으로서 “‘파국의 유물론’ 같은 유치찬란한 철학적 선언, 요설“(서동진).
  • [라쇼몽]의 라스트신에서 ‘선의’를 ‘악의’로 갈아끼운 일베. 누군가를 아무런 희망없이 증오하는 사람들. 초월적 타자를 온 힘을 다해 추락시키는 그들은 초월적 타자가 추락해 내재적 타자의 ‘이상성’이 붕괴하면 ‘모방(실현)가능성’도 사라진다는 것, 즉 내재적 타자도 따라서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지만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평등한 (시민/)병신“이 될 수 없고, 따라서 그런 ‘희망 없음’과 ‘(사랑/)증오’를 받아안고, “[타자]”와 마주쳐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야한다. 희망없는 사랑, 곧 건강한 비관주의로서의 정치. “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발터 벤야민, [일방 통행로])

03. 서비스,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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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아듀 파라다이스 2005 – 2015]

2015.03.28.『서울아트시네마』[아듀 파라다이스 2005 – 2015] 오픈토크 “1995 – 2015 변모하는 영화의 풍경”

55분 즈음부터 띄엄띄엄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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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정성일: 제가 생각하는 21세기의 가장 이상한 씨네필은…네 번째 씨네필입니다. 바로 아이맥스 시네필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이맥스 영화만 보러 다닙니다.
김홍준: 왕십리 씨네필이죠.
정성일: 이들을 물론 테크노페티쉬라고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그러나 이들도 분명히…심지어 울산에 아이맥스가 새로 문 열었대, 그러면 순례를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시네필 현상입니다.

02.
정성일: 여러분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이는 영화들과 거의 무관심한 영화들의 차이를 저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라울 월시를 보러 왔을 때, 이 위대한 이름의 영화를 보러 왔을 때, 텅 빈 객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성일이 언급한 네 부류의 시네필: 정통적인 시네필/영화제 시네필/시네큐브 시네필/아이맥스 시네필
허문영이 추가(1시간 24분 즈음)한 시네필: 영화 이론필

허문영: 아주 소수긴 하지만…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영화제에 강연을 하러 가면, 영화는 안 보고 강연만 들으러 오는 분들이…왜 그럴까? 그럼 영화를 딴 데서 봤느냐, 안 봤습니다. 그냥 강연만 듣는 겁니다. 제가 어떤 강좌에 들어가서 특강을 한 적이 있는데 한 학생이 제게 묻더라고요.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서 정말 궁금합니다. 오즈에 대한 견해를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질문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반문하기를 ‘오즈 영화 중에 뭘 좋아하느냐’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 대답이 ‘전 오즈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았습니다.’ 이러더라고요. 오즈 영화를 하나도 보지 않은 사람이 왜 오즈 영화에 대한 견해를 궁금해하는 걸까? 영화 담론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걸 이론 페티시즘이라고 붙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걸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영화의 친구, 지지자가 되고 시네필이 되는 경로는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처음부터 너무나 넘쳐나서 신에게 단번에 복종하는 신도의 자세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물론 저 끝에 계신 분(정성일)은 비교적 그런 분…좋은 의미의 지적 허영심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끌 수 있는 중심적 커뮤니티나 공간이 지금 부재한다는 생각에 동의를 하고요. 영화에 대한 순혈주의적 애정을 지키는 게 어느 시절보다 중요하다고 믿습니다만, 동시에 영화제나 시네마테크가 좀 방탕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논리적으로 불가하지만 양립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03.
허문영: 저도 고민인 것이 왜 영화제에서는 매진을 기록한 영화가 극장에 걸리는 순간, 영화제에서 모은 관객이…예를 들면…그…어…어떤 영화를 예로 들 수 있을까요? 교황…예?
정성일: 카페 느와르(웃음)
허문영: 솔직히 [카페 느와르]는 성공적인 편…제가 알기로는 한 8천명 정도 들었다고 하는데. [교황 만세] 같은 경우는 만 2천명 들었는데 극장에선 2천명을 못 넘겼다고 압니다.
김홍준: 이제 한 10년만 있으면 필름으로 한 번도 영화를 보지 못한 세대…그런 세대가 시네필이 되는 시대가 곧 올 텐데, 저희는 지금 그런 전환점에 있는 거죠. 지금 분위기가 너무…전세계 영화제를 책임져야할 것 같은 그런. 돈도 안 주면서. 좀 약간 가볍게 무책임한 얘길 하자면, 지금이야말로 필름을 상영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는, 그런 곳을 고색창연한 산사를 홍보하는 느낌으로 홍보해야 할 것 같아요. 좋다는 불상을 보면서, 뭔지 모르겠지만 예술인 것 같아, 그런 정도의 미적인 숭고한 느낌을 필름을 통해서 할 수 있다고 선전을 해야할 것 같아요. 멀티플렉스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영사사고, 필름 스크래치. 뒤집어 말하면 키노도 재창간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보를 디지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빠닥빠닥한 종이를 손으로 넘기면서. 사이트 앤 사운드 같은 잡지가 오히려 지금 더 잘 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인쇄물이라서 그런 것이거든요. 여기서 잠깐 웃기는 얘기를 하나 할게요. 여러분이 자꾸 실버 영화관을 안티고니스트처럼 얘기하는데. 까놓고 말해서 저어하는 것 같아요. 근데 이 실버 영화관에서 장밋빛 인생을 상영했어요. 제가 어느 날 여기 왔는데, 어? [장미빛 인생]이 있는 거예요. 왜 나를 GV로 부르지 않을까, 바로 갈 수 있는데. 그렇게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까 중고등학생을 끌어들이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여러분이 60, 70이 됐을 때 저런 실버영화관에 가고 싶진 않잖아요, 별로. 여러분이 60, 70이 됐을 때, 계속 시네마테크에 손자를 데리고 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정성일: 여기 오신 분들 중에 혹시 실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신 분 있으세요? 아, 예. 저는 사실 가끔 갔거든요. 왜냐면 의외로 프로그램이 되게 좋아요. 더글러스 서크나 니콜라스 레이, 심지어 여기서 한 번도 상영하지 않은 킹 비더 영화를 상영했어요. 물론 여기 올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황급히 들어가죠. 안 들키려고. 들어가서 실제로 보면 분위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물론 지금 이 공간과 저 공간이 세트화 됐다는 느낌이 드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 영화관의 세트화에 대해서는 다소 우려감 있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한 번은 지하철에서, 몹시 놀라운 순간을 본 느낌이었는데. (…) 하루는 서서 가는데 20대 여자 두 분이 서로 얘기를 하는 거예요. 한 분이 그러는 거에요. ‘야 무슨 영화 재밌다는데 우리 가서 보자.’ 친구 분의 대답에 저는 놀랐습니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인용하자면, ‘너 미친 거 아냐? 요새 누가 극장 가서 영화 봐. 영화는 스마트폰으로 보는 거야. 요새 영화관에 영화 보러 가는 건 아줌마 아저씨들이나 그러는 거야.’라고 대답을 하는 거에요.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드리면, 아까 필름에 대한 향수를 얘기했지만, 정확하게 필름에 대한 제 느낌은 두려움입니다. 어린 시절…매번 재개봉관에 영화를 보러 갑니다. 영화를 보러 갈 때마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필름이 얼마나 손상됐을까 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제가 결정적으로 디지털로 영화를 처음부터 경험한 사람들은 절대 이 두려움을 못 느낄 거라 확신하는 영화가 베리만의 [페르소나] 입니다. …갑자기 프린트가 타버리죠. 전 처음에 그 장면이 너무 쇼크라 욕을 했습니다. 뒤를 봤는데 프로젝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영화가 상영되고 있고, 뒤늦게 트릭이라는 걸 알아챘고. 디지털로 보는 사람들은 그 트릭을 너무 쉽게 알아차렸고 베리만의 연출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 장면의 쇼크는 어떤 작용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존 포드의 [수색자]를 여기서 저와 함께 보셨던 분들은 그 수색자가 완전히 잘못 상영됐다는 걸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마스킹을 완전히 잘못해서, 세트에서 찍은 위에 세트가 프린트에 다 나왔습니다. 거의 그러니까 포드 영화가 브레히트적 효과를 낳는 듯한.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아무 상관없다는 듯 보고 있을 때 약간 당황했습니다. 시사실에 뛰어들어가서 얘기하기엔 제가 중간에 앉아서 너무 불편한 상황이었고, 그냥 보고 있었을 때, 이런 경험들이 저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최근에 제가 놀란 건, 모 토렌트 사이트에서는…이제는 파일을 파는 분들 중에도 시네필이 있으신가봐요.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뽑은 영화 100편 4만 5천원 자막 있음. 파일 보내드립니다. 그걸 볼 때 망연자실해지는 겁니다.
김홍준: 최근에 여기영상자료원에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상영했죠? 제가 대한항공 타고 베를린 가는데, 고전영화 섹션에 그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첫째로 이게 여기 왜 있을까? 그리고 만일 누군가 SF를 좋아하는 사람, 그러니까 최신, 톰 크루즈 나오는 그런 SF 영화 좋아하는 사람이 어 이런 것도 있네? 하고 그걸 끝까지 봤다면, 그 사람은 그걸 봤다고 할 수 있는 걸까.

04.
김홍준: 몰락할 정도로 높이 올라간 적이 있었나, 어떻게 생각하면. 90년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상전벽해가 된 게, 그때 갑자기 많은 신문들이 영화면을 만들었거든요. 당연히 영화 담론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활발하게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썼는데. 2015년에 다시 보니까 60년대로 돌아간 것 같아요. 영화면이 사라지고 물론 문화면이 있지만 영화가 다시 사회면에 등장하는. 저는 가장 큰 책임이 있다면 대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프라가 없는 상태에서 비평만이 수준을 유지하길 원한다는 것은 기형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반짝 하며 부상했던 시절에 보면 너무들 다 바쁘시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과 크리티시즘은 분명히 구분이 되어야 하는데, 한 사람이 아침에는 막 저널리스틱한 평을 써서 기고하고 점심에는 라깡에 대해 강의를 하다가 저녁에는 자기가 쓰고 있는 논문을 뭐…이런 정신분열적인 상황들이 되다보니까. 저도 책임을 피할 수 없지만 학문적인 바탕이 좀 더 튼튼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그런 것에 대한 지지와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몰락이라는 것은, 그런 이유가 하나 있지 않은가. 그 얘기도 지적을 하고 싶었습니다.
정성일: 제가 제 동료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얘기하기보다는, 완전히 사적인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시네마테크 회보라고 불러야하나요? 그날 여기서 영화를 보고 집에 가던 길에 보니까 앙케이트가 있는 거예요. 쭉 보다가 봉준호의 답변에, ‘안타까운 일이지만 비평의 몰락이라고 생각한다.’ 종로 3가 지하철로 내려가던 길의 계단에 멈춰섰습니다. 그 문장을 노려보았습니다. 봉준호가 잘못했단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게 만든, 비평을 썼던 나와 내 동료들이 몰락했단 느낌보다는, 무언가 지금 잘못했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겠습니다. 처음 제가 영화에 대해 알고 싶었을 때, 저는 잘못된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해서 영화에 대하 알고 싶어서 영화에 대한 책을 찾아보았을 때 제가 참고할 수 있는 한글로 쓰여진 책은 단 한 권도 없었습니다. 뭔가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아직은 성업 중이었던 종로서점과 교보서점을 찾아 보았고 그때 막 유학을 떠나기 시작한 친구들에게 영화에 대한 글들을 때로는 카피본을, 때로는 단행본들을 부탁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이 이런저런 책들을 보내주기 시작했고, 그때 영화에 대한 책이 가장 많았던 곳은 서강대 도서관이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고, 그런데 첫째, 그때는 영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고 싶었는데, 이 영화에 대해 풍문들만 있지, 그 영화에 대해 그때 누구도 이 어린 학생을 안내해줄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낮은 수준의 개론서와 아주 높은 수준의 담론들을, 이 책 읽고 저 책 읽고 그냥 건너뛴 겁니다. 갭이 너무 크죠. 이 갭을 이 어린 학생은 저의 친구들은 하여튼 메꿔야만 했습니다. 그때는 미처 70년대 영화 이론에, 프랑스 영화 이론들이 넘어왔단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알튀세르, 푸코, 라깡,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습니다. 맥락도 알지 못한 채로. 그러니까 거꾸로 푸코가 어떤 사람인지 글을 읽고 나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야 하고 뒤집어 읽어나간 겁니다. 어떤 친구는 프랑스어를 잘했고 어떤 친구는 영어를 잘했습니다. 저에게 도움이 됐던 건 일본어였습니다. 그때 막 일본에서 현대사상과 유레카를 중심으로 프랑스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가 유행처럼 쏟아지기 시작했고, 아사다 아키라라는 스타 철학자가 등장하여, 말하자면 가라타니 고진과 하스미 시게히코 이후의 스타로 부각하였고, 교토 대학 출신의 경제학부를 나온 이 어린 천재는 17살에 자본론을 읽었고, 대학교 2학년 때 독학으로 앙뛰 외디푸스를 읽은 다음에, 들뢰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쓴 사람입니다. 하여튼 그런 책들을 읽으며 머릿속은 완전히 잡동사니가 되버린 거죠. 한쪽으론 그런 이론들이 계속해서 들어왔고, 한쪽에선 80년 5월이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격문들이 붙어있었고 격문에 나부끼는 문장들은 지금은 고색창연한 투쟁이었습니다. 첫 시작은 프랑크푸르트였고 거기서 마르크스로 넘어가는 데 한달음이었고 그 다음엔 레닌이 도착했고 또 한쪽엔 그람시가 도착했습니다. 한편으론 제3세계 종속이론에 관한 이론이 도착했고, 그 다음엔 플란차스로 넘어가서 플란차스 이론의 유행이 끝나자 도착한 건…그 다음엔, 여러가지 이론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90년대가 시작해자 갑자기 이 좌파 이론과 맞서듯이 페미니즘 이론이 깃발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여러분들도 알 것입니다.(정성일, 인터뷰 거부선언했던 김기덕을 만나다 (1)) 하여튼 저는 영화가 알고 싶었고, 제 비평 속에 이론에 관한 대답을 얻고 싶어했고, 그런 것들을 쫓아갔습니다. 결정적인, 저의 결정적인 이론과의 작별은 재현 속의 여자들이라는 엘리자베스 코위의 책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그 책은 라캉, 크리스테바, 뤼시드가라이, 엘레니시쿠스 같은 이름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책이었습니다. 읽다가, 너무 화가 나서, 이 책을 제가 찢어버렸습니다. 비유법이 아니라 진짜로 찢어버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저에게는 어떤 완전한 태도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제가 15년간 쫓아왔었던 이 영화 이론의 공통점이 뭔지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그 명제, 강령은, 다 다른 각도에서였지만, 딱 한 가지였습니다. 영화는 환상이야, 그러니 정신차려 였습니다. 제발 꿈에서 깨어나세요 였습니다. 이 모든 이론들의 공통점은, 영화는 이데올로기야, 꿈이야, 환상이야, 제발 정신 차리고 깨어나 였습니다. 제가 화가 나서 찢어버렸던 제일 큰 이유는, 문득 내가 이 사랑을 처음 느꼈던 순간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난 이게, 마법의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론 따위가 뭐라고 내게 감히 건방지게 깨어나라 그래. 나는 이 이론과 내내 전투할 거야. 나는 이론과 싸우기 위해서 비평을 쓰기 시작할 거야. 그 이후로 더 열심히 이론을 읽었습니다. 왜. 이유는 딱 한 가지였습니다. 너희들이 부정하는 것을, 난 긍정할 거야. 내 긍정을 위해서, 난 비평할 거야. 난 내 사랑을 회복할 거고 방어할 거고 그걸 위해서 글을 쓸 거야. 그게 비평을 쓰는 나의 임무야. 나는 생각을 갖고 이 장소에 와서 존 포드를 보고 라울 월시를 보고 더글라스 서크를 봤고, 올리베이라를 봤고 누벨바그 영화를 봤고 페드로 코스타를 봤고 그리고 왕빙의 영화를 본 겁니다. 저는 비평이, 말하자면 이론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강요하듯이 꿈에서 깨어나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영화를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장소까지 와서 영화를 보는 이유가 뭡니까? 그 마법의 순간을 다시 맛 보고 싶은 거 아닙니까, 그게 여러분들을 매혹시켰던 거 아닙니까? 나를 완전히 매직의 순간으로 이끌었던 그 맛을 느껴보기 위해 이 장소에 와있는 거 아닙니까? 근데 이론 따위가 날 깨우겠다고? 했을 때 저는 이론의 적이 되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이 비평의 몰락이라는 말을 읽었을 때, 예, 물론, 그 비평의 몰락이 어쩌면 별점 따위로 환원지어버린 20자로 이루어진 영화평들에게 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비평가라는 이름을 단 사람이 영화를 보자마자 즉각 나와서 자기 트위터에다 본 영화평 올리는 건 자판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비평가입니까? 자기가 감히 영화를 보자마자 비평을 쓸 수 있다고? 저는 비평하기 위해서 시간을 벌어야 하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생각하고 그 생각한만큼의 시간이 거기 담겨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 제 많은 동료들은 자판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건 평이 아니죠, 그냥 자동 반응인 거죠. 저는 제 동료들이 영화에 대한 사랑을 그 마법의 순간을 탈마법 시키라고 외치는 이론에 대해서 저항하고 이 영화의 마법을 다시 방어하는 그 자리로 돌아가서 기쁨을 되돌려줄 때에만, 저는 이 몰락의 위기로부터 다시 비평이 영화의 편에 서서 영화와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비평은 쓰레기다)
허문영: 약간 부흥회 같은…그런 말씀을. 제 책자 한쪽에 꽂혀있던 1992년에 나온 협회에서 발행한 영화평론이란 기관지입니다. 여기에 좌담이 실려있는데 원로 영화 평론가들과 신진 평론가들이 한 6명 정도 모여서 얘기를 나눈 자리입니다. 여기의 사회자는 신진 평론가 정성일이었습니다. 갓 서른이 넘은 신진 평론가였는데. 이게 재밌다고 생각한 이유는, 원로 한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영화 관객들이 평론을 믿지 않습니다. 관객들이 평을 보고 영화를 보러 가는 시기는 지나간 것 같습니다. 1992년이 이미 그랬으면, 뭐가 이렇게 몰락할 게 더 있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위기라는 표현은 굉장히 저널리스틱한 표현입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위기, 죽음이란 표현이 나오면 전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시대를 그렇게 극단적인 언어로 드러내고(들어내고?) 싶어하다는 것이 사실 글 쓰는 사람들, 혹은 저널리스트들이 늘상 해오는 일 중 하나입니다. 이제 금방, 마치 모든 게 끝나고 중대한 파국 직전인 것처럼, 혹은 정반대로 위대한 부흥의 시기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일종의 저널리스트, 글쟁이들, 저 같은 사람까지 포함한, 일종의 그 습관이고 클리셰 같은 겁니다. 저는 그런 표현들을 가능하면 경계하고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마 비평의 몰락이란 표현이 저한테 환기시켜 주는 것들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이 정확히 환기시켜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영향력 있는 지면에서 비평의 실종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사실 정확한진 모르겠는데, 누구도 증명할 순 없지만, 살인의 추억이 개봉했을 때 그 흥행에 상당 부분을 그때 이동진 씨가 조선일보에 쓴 굉장히 호의적인 평 때문이라고 차승재 PD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까지는 확실히 그랬을 수 있습니다. 그때가 거의 마지막 시기였던 것 같고. 그 이후로는 어떤 매체에 실린 영화평이 사람들을 움직여서 한 편의 영화를 화제의 중심에 놓거나 흥행을 시키거나 하는 시기는 더 이상 오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의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정 모 평론가가 극찬한 영화는 내가 볼 영화는 아니다, 뭐 그런 확신을 가진 분들도 생겨난 것 같고.
정성일: 전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어떤 영화 시사를 보고 나왔는데 영화 제목은 언급할 필요 없겠죠. 그 영화 진짜 좋아서, 홍보사에게 연락해준게 너무 고마우니까 나가면서 말해주니까, 그러자 담당자가 이랬습니다. ‘아이 씨발, 어떻게 해…’ 이러며 상당히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허문영: 바로 이것이 몰락인 것입니다.(웃음)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뭐랄까 이제 저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중간지대 영화들이 있습니다. 상업적으로 기획됐지만 감독의 개성이 살아있는 중요한 영화들이 비평과 행복하게 만났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은 2000년대 초반에 끝이 납니다. 끝이 나고, 그 이후로는 비평가들은 영화 시장, 산업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자기 견해를 피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굳이 비평의 몰락의 의미하고 있는 바는 저는 영향력 있는 지면에서 비평의 실종, 혹은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비평가의 몰락. 몇몇 기성 영화 비평가들의 몰락이라고 말할 순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비평이 몰락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비평은 몰락하고 자시고 할 게 없습니다. 이미 92년에도 뭐, 믿지 않았는데 뭘 또 새삼스럽게 믿지 않는다고 통탄할 일도 아니고 다만 비평은 비평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안 하면, 약간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계속 하는 겁니다. 그것이 제도적으로 보장이 되지 않는다고 비평이 몰락했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혹은 일간지에서 비평을 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비평이 몰락했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트위터가 영화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양가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블로그는 영화 비평에 굉장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영화에 대해서 쓰려고 할 때, 혹은 견해가 궁금할 때, 자주 찾아보는 블로그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제가 생각할 때 제 동료 평론가들만큼 도움을 주거나 배움을 줍니다. 이 새로운 매체들이 만들어낸 좋은 비평의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성 영화 평론가들이 몰락했을 수 있어도, 비평이 몰락한 건 아니고, 오히려 더 범위가 넓어지고 더 다양한 의견들이 활발히 개진되고, 있다고 전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편이고. 다만 이런 다양한 의견들이 한데 모여서 갑론을박 하고 논쟁하고, 좀 더 생산적인 논쟁이나 담론의 장을 어디선가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굳이 말한다면 그것이 제 고민이지, 비평 자체가 몰락했다는 건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05.
김홍준: 영화 이름 찾아주기 운동을 했으면 좋겠어요. [관계의 종말]도 정식 개봉한 게 아니라 80년대에 비디오 테이프로 나왔는데, 그때 비디오 테이프를 출시하는 이름 모를 담당자께서 그냥 지으신 거든요. 그런 거 많아요. [브라질]은 [여인의 음모]가 됐고. 적어도 시네마테크에서 그 영화를 틀 때에는, 그냥 단순히 그 영화가 한국에 개봉될 때, 혹은 출시될 때 그 제목으로 됐다는, 개봉까지만 해도 참겠는데 비디오로 출시된 게 순간의 실수가…새롭게 시네마테크에서 원문에 가까운 제목을 붙여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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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이 정리한 전문 녹취록.

씨네21 20주년 특대호에도 실렸다고 한다.
CDLA3hxW0AAk0m5

사진은 서울아트시네마 트위터 계정(‏@seoulartcinema)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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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해서 반응이 좀 나오길래 정리해봤다.

01. 듀나(‏@djuna01)의 트윗
“글쎄요. 전 정성일씨가 말하는 비평과 당일 올라가는 인상 리뷰는 전혀 다른 작업이라고 생각해서. 두 종류의 작업은 영화가 태어났을 때부터 공존해왔어요. 당일 140자로 올라가는 인상 리뷰가 있다고 해서 전자의 작업이 침범당하는 건 아니죠. 이 둘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리고 시사회의 첫 인상이란 건 중요한 정보죠. 곧 형성될 ‘주류 의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니까요. 물론 재빠른 사람들은 동료들의 트윗을 엿보고 쓸 수도 있겠지만. 피드백의 형식은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다양성이 평균의 질을 보장해주지는 않겠죠. 시민 케인이나 현기증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관객들의 트윗을 볼 수 있다면 참 멋질 거라고 생각해요.”

02. 비평에 대한 단상(ㅍㅍㅅㅅ에도 올라옴) – Fantasy(satan_tango)

03. [Critique] 비평에 관한 두 개의 글 – 유운성

04. 정성일과 듀나의 ‘논쟁’ : 비평의 몰락? – mc 워너비(@mcwannabee) → 듀나: “웬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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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9일 서울아트시네마 낙원 마지막 상영 – 거시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라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나갈까 저어되어 몇 번 망설이다 지웠지만, 세월호 1주기에 대해 무언가 적지 않으면 스스로 다짐할 수 없을 것 같아 남겨봅니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라>

01.

2013년 말, 경찰의 민주노총 강제 진입 사태를 보며 잠을 설치다가 처음 집회에 참여했을 때가 떠오른다. 몇 번 나가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이후 몇 번 이런저런 집회와 시위와 행진에 참여했는데, 그때마다 혼자 나갔다.

상황은 거의 매번 똑같다. 어색함을 무릅쓰고 구호를 따라 외치다가 행진을 시작하면, 경찰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그렇게 몇 차례 옆길로 빠지고 다시 막히고 하다보면 “삼삼오오 흩어져서라도 XX을 도우러 XX에서 다시 모입시다”라는 말이 들려온다. 수만명이던 사람들이 수천명에서 수백명 정도로 줄어들고, 각자 흩어지는 가운데 따라갈 깃발도 없이 혼자 골목길을 달리는 나만 남는다. 이때가 되면 어릴 때 하던 술래잡기나 숨바꼭질이 떠오른다. 저녁 무렵 놀이를 시작하면 한참 아이들을 찾을 때 어느 순간 해가 질듯 말듯 하고, 그러면 문득 잡을 사람은 없는데 나만 바보짓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게 경찰의 의도겠지, 하며 용케 저지선을 뚫고 모이기로 한 장소나 그 앞의 또 다른 저지선 앞에 도착하면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됐다는 것이 느껴진다. 열광이 사라지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눈치챌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간혹 연행 경고까지 나오니, 보통은 이때 귀가했다. 그렇지만 2015년 4월 16일 저녁부터 17일 새벽까지, 어제와 오늘은 남아보기로 결심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확고한 결심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막차가 끊긴 데다가, 마침 예비 배터리도 있었고, 사방에 경찰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남기는 했되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켰다, 보다는 지켜봤다, 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내가 있는 광화문 광장은 이미 현장이 아니었다. 수십 미터 앞에 차벽으로 막혀 보이지도 않는, 간헐적으로 플래쉬가 터져나오는 경복궁 앞의 유족들이 있는 그곳이 현장이었다. 옷을 얇게 입고 나와 춥다보니, 차라리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연행 경고 방송이라도 나왔으면 좋았겠단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무슨 비장한 심정이라도 가장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내가 있던 곳은 그런 장소조차 아니었다. 경찰들은 우리를 가로막고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니까 그냥 나는 거기에 아무런 관련도 없이 서있었다. 질서유지벽을 걷어찰 힘도 없이 오들오들 떨며 서있었다. 전날 오후 7시부터 새벽 5시가 넘도록 서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유가족들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한 남남에 불과했다.

집회가 있기 며칠 전, 차벽을 왜 세우는가, 최루액을 왜 (얼굴에) 뿌리는가, 라는 질문에 책임자인 경찰청장은 “그러지 말라는 규정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판단을 떠넘기고 다시 떠넘기다 못해 말단으로부터 최종 책임자에 이르면 단지 그러지 말라는 규정이 없다는 순환논법이 도출될 뿐이다. 여전히 이곳에 판단은 없다. 끝내 그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 어떤 거대한 음모나 악의적인 의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날도 차벽을 세웠고, 최루액을 뿌렸고, 갈비뼈 네 개를 부러뜨렸고, 6만여명의 일체감을 효율적으로 파괴했다. 그 일체감은 단지 환상에 불과했을지 모르나 이것 또한 연대의 토대 중 하나다. 박근혜 정부는 닭처럼 무식해서 문제가 아니라 그 누구도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지 않기에 문제다. 그리고 그들의 철저한 무사유가 지금 한국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있다. 이것에 대한 최종 책임도 대통령이 질 수 있을 것인가? 그에겐 그럴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02.

분노나 슬픔은 없었고, 그저 무력하다가, 패배주의적인 생각이 들었다가, 춥다가, 심란하다가, 지루해졌다. 이런 기분도 몇 차례 겪었다. (나는 사실 후원하는 당도 있지만) 혼자서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한 뒤 공부하며 그나마 하나 배운 것이 있다면,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동안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단 것이다. 깨닫고 보니 나는 고립이 두렵다. 다행히 외로움을 품고 연대를 구할 여유가, 그 여유를 찾을 일상이 내게는 있다. 그래서 그동안은 그걸 미처 몰랐던 것이다. 내가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을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단 것을. 고독은 견딜 수 있어도 고립은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순수 유가족‘ 타령을 하는 정부의 속내는 뻔한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근본적으로 순수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셈이다.(심지어는 정부가 ‘순수 유가족’으로 분류한 분들도 어느 면에선 그렇다) 프리모 레비가 “진정한 증언자“는 아우슈비츠에 죽어있다고 했듯이, 진정으로 순수한 피해자/당사자도 지금 저기 세월호에 가라앉아있다. 누구도 그런 방식으로 순수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국가는 이런 방식으로 희생을 독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좋든 싫든 모두가 고립된 것이고,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정치에 관심은 많지만 집회에 자주 나가지 않고, 내 일상은 아주 안온하다. 그렇기에 지금 고립되어 싸우는 (비단 세월호 유가족들 뿐만이 아닌) 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는 얼핏 광화문 광장에서 내가 애타게 바라보던 경복궁 앞처럼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이지만, 가로막혀 건너갈 수 없고 벽에 막혀 보이지도 않는 아득함으로 멀다. 하지만 어제 “우리가 내민 손을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라며 눈물을 흘리던 최윤아 씨를 보며 (감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도 그렇게 강한 사람은 아니다. 세상에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중앙일보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국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힘듦’이라고 한다. 그에 발맞춰 유가족들에 대한 동정 여론도 줄어들고, 세월호 보도에 대한 피로도도 높아지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절대 유가족들이 짊어지고 있을 그 감정을 똑같이 짊어지고 갈 수 없다.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는 그들을 고립에서 구해내야 한다. 똑같은 (학)부모의 심정으로, 똑같이 죄를 지은 어른의 마음으로, 동생을 잃은 형/누나/언니/오빠의 마음으로, 동생의 마음으로, 친구의 마음으로…, 그런 섣부른 ‘동정의 여론’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고립됐을 때의 두려움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그 마음으로 나는 연대하고 싶다.

고립을 두려워하여, 연대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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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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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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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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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 4월 17일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타인들의 공동체”이고, 일시적으로 서로 일체감을 느끼는 상태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런 상태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는 사회는 없다.” – 장-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2010년대 영화-세계의 파국과 구원: [고질라]와 [인터스텔라]를 중심으로

2010년대 영화-세계의 파국과 구원: <고질라>와 <인터스텔라>를 중심으로

“사물이 ‘이렇게 계속’ 진행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파국이다. 파국은 임박한 무엇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주어지는 사물의 상태이다.”

– 발터 벤야민, [중앙공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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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헐리우드 여름 영화에 대해, 앤드류 밀너 교수와의 인터뷰

2014년 헐리우드 여름 영화에 대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앤드류 밀너 교수와의 인터뷰

 

앤드류 밀너 영문학, 비교문학 명예교수(멜버른 모나시 대학교)와의 인터뷰

[대만의 댄 블룸이 2014년 5월 포스팅]

이 인터뷰는 새로운 기후물(클라이파이; Cli-fi) 장르와 기후물이 할리우드 영화에 미친 영향에 대한 최근의 타임TIME지 기사(기사 원문, 전문을 볼 수 있는 블로그)를 둘러싼 논란에 관해 밀너 박사와 나눈 문답이다. 그의 답변은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시간을 내 질문에 답변해주신 밀너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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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포는 축어적 잠의 꿈을 꾸는가? 재현의 SF적 이론], 저자 인터뷰

영어 위키백과 Science fiction studies 문서를 위키백과 과학소설 연구 문서로 옮겨오다가 문득 주요 작업 항목에서 Seo-Young Chu라는 몹시 익숙한 느낌의 이름을 발견했다. 한국인은 아니고, 한국계 미국인 학자인 모양이다. 관련 정보를 찾다가 다음 인터뷰를 보고 마음이 동해 대충 옮겨보았다.

저자 소개:
주서영은 퀸즈 칼리지와 뉴욕 시립 대학교에서 영어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녀는 “메타포는 축어적 잠의 꿈을 꾸는가? 재현의 SF적 이론 Do Metaphors Dream of Literal Sleep? A Science-Fictional Theory of Representation”의 저자이다. 책에서 주서영은 SF가 일종의 ‘강도 높은 리얼리즘 high-intensity realism’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출처: http://www.ttbook.org/book/seo-young-chu-do-metaphors-dream-literal-sleep

책 소개:
문화계와 학문계에서, SF적 세계는 비현실적이고 온통 상상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주서영은 장르에 대한 이런 인식에 대해 대담한 도전을 제안하며, SF가 전통적인 “리얼리스트”의 재현 양식을 빠져나가 비-상상적 대상을 재현할 수 있는 “강도 높은 리얼리즘”의 일종이라고 주장한다. 축어와 비유의 이분법을 초월할 수 있게 해주는 서정의 힘에 지원받아, SF는 자연 속에서 완전히 비유적이지도 완전히 축어적이지도 않은 재현의 대상을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주서영은 세계화된 세계, 사이버 스페이스, 전쟁 트라우마, 한(恨), 로봇 인권을 통해 이전에 설정된 SF 경계 안팎을 넘나드는 시, 소설, 음악, 영화, 시각적 조각, 그리고 다른 작품들을 탐사한다. 리얼리즘과 SF 사이의 구분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메타포는 축어적 잠의 꿈을 꾸는가?]는 우리의 일상 현실이 갈수록 간단명료한 재현에 저항함에 따라 점차 더 중요해지는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자원으로서의 SF의 가치를 해명한다.
출처: http://www.hup.harvard.edu/catalog.php?isbn=9780674055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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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라는 괴물들 – 서동진/문학평론가

중등우리교육 2002년 5월호(통권 제147호), 2002.5, 77-87 (11 pages) – [특집] 청소년, 성장을 금지당한 ‘아이들’

청소년이라는 괴물들 – 서동진/문학평론가

상호주관적 세계 속의 타인들, 청소년
청소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들이 어른들과 구체적으로 다른 집단이란 건 알겠는데, 그 둘 사이의 ‘차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갈수록 보이지 않는다. 나날이 청소년들과 어른들 사이의 골이 깊어지고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데, 그래서 논리적으로는 갈수록 어른들과 다른 청소년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라야 하는데 청소년들의 모습은 전혀 오리무중이다. 이런 괴상한 역설 속에서 청소년들과 어른들 사이의 공약가능한 세계는 나날이 사라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른과 청소년이라는 두 집단 사이에 무난한 의사소통의 실현을 보장하는 상호주관적 세계란 것이 언제는 있기나 했던 것일까.
함께 산다는 것은 분명 상호주관적인 세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그 세계는 막연하게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걷어치우고, 서로가 서로를 잘 알도록 노력하고, 관심을 더 기울인다 해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린이, 청소년, 성적 소수자, 장애인, 이민노동자, 여성 등등과 더불어 살기 위해 편견과 오해를 버리고 그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충고를 귀가 아프게 들어왔다. 정말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일까. 다원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출발한 듯한 이 충고와 명령들이야말로 오히려 다원성을 위협하고 차이의 공존을 위협해 왔던 것은 아닐까?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