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기의 SF칼럼 :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

이매진 칼럼 (1) –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 연재를 시작하며

과학소설(SF)에 대한 관심이 느리지만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과학소설을 내는 출판사들도 늘고 있고, 이미 나와 있는 소설들을 찾아 읽는 열성적인 독자들도 늘고 있으며, 앞으로 출간예정인 작품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소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데 비해서 이를 체계적으로 (그러나 결코 골치 아프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자리는 크게 부족했습니다. 「홍인기의 SF 칼럼 :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부족분을 메꿔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앞으로 본 칼럼에 올라올 기사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도대체 SF란 무엇인가? SF가 기존의 문학과 어떻게 다르며, 다른 장르문학과는 어떻게 다르고, 또 사람들은 그런 SF를 왜 읽는가? 이러한 아주 커다란 질문들이 첫 세 꼭지의 글에서 제기될 사항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어려운 문제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편의상 SF의 정의에 관한 꼭지를 세 번째로 미루고, 우선 SF를 읽는 재미에 관한 것들을 살펴보고, 그런 재미가 Fantasy와는 어떻게 다른가를 살핀 다음, 이를 순수문학과 비교하기로 합니다.

― SF는 언제나 열두 살박이? : SF의 즐거움에 관한 탐구
― 세상을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 : SF와 Fantasy의 모호한 경계
― 복거일과 이영수의 차이 : 순수문학과 SF의 구분

(2) 두 번째 단락에서는 SF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오해들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SF는 과학기술에 관한 것이니까 당연히 미래 예측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과학기술을 묘사하니까 하드 SF는 읽기 어렵고 재미없지 않을까? 그렇게 어려운 내용을 중단편에 밀어넣는다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물론 다섯 번째 기사인 하드 SF에 관한 내용에서는 하드 SF에 속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SF를 당연히 함께 소개할 것입니다. 여섯 번째의 단편 SF에 관한 꼭지는 매거진으로 시작된 SF의 역사가 어떻게 면면히 이어 내려져 오고 있는가를 다룹니다.

― 핵폭탄에서 컴퓨터까지 : SF는 점쟁이 역할을 해야 하는가?
― 하드 SF는 정말 씹기가 딱딱해 : 하드 SF의 허허실실
― 짧고 굵게 삽시다 : 단편으로 거듭나는 SF의 세계

(3) SF는 지금까지 큰 변화를 세 차례 겪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를 통해서 더 나은 장르문학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장르의 구분을 뛰어넘어 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 걸쳐 독창적인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SF의 현주소를 이해하는데 세 차례의 변혁은 그러므로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이 대목은 세 꼭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SF계의 운동권 #1 : 뉴웨이브
― SF계의 운동권 #2 : 페미니즘
― SF계의 운동권 #3 : 사이버펑크

(4) 마지막 단락은 철저하게 한국적인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어디서 어떤 식으로 만나고 모여서 SF를 읽고 싸우고 노는가? 어떤 식으로 SF가 번역 소개되고 있는가? 무슨 문제점이 있는가? 창작 SF는 왜 부진한가? 대안은 있는가? 한국의 SF의 현실에 대한 단호한 진단과 과감한 제안을 다루는 기사들이 될 것입니다.

― 지지고 볶는 사람들 : SF 팬들의 요지경 모임
― SF로 돈 날리는 사람들 : 어떤 SF를 번역 출간해야 하는가?
― 변방의 SF : 한국적 SF란 존재하는가?

이렇게 「홍인기의 SF칼럼 :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일 년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시고, 부족한 점이나 잘못된 점이 보이면 주저 말고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매진 칼럼: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 (1)

(2001년 04월 01일)

이매진 칼럼 (2) – 과학소설은 언제나 열두 살: 과학소설을 읽는 즐거움

1980대초 《Locus》라는 과학소설 뉴스 전문 잡지에서 6-7천 명에 달하는 정기 구독자들을 대상으로 “몇 살 때 처음 과학소설에 접했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다. 1천 명이 넘는 응답자 대부분이 10세에서 14세 사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누구나 12세 전후에 과학소설을 읽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과학소설을 평생 즐기는 충성스러운 독자들은 대개 12세 전후에 과학소설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조사가 있기 전부터, 출판업계나 팬들 사회에서는 대충 그러려니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미 “12”라는 숫자는 과학소설을 묘사하는 데 여러모로 요긴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사람들의 목적에 따라 사뭇 달랐다.

먼저 과학소설을 비웃으려는 이들은 “12”라는 숫자가 과학소설의 정신연령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과학소설은 진지하고 심오한 순수문학에 비할 바가 아니며, 아예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출판계 쪽은 “12”라는 숫자야말로 팔아먹을 수 있는 책의 내용을 뜻하게 되었다. 똑똑하고 멋진 “미래”의 주인공이 신기한 무기나 장치를 이용해서 악당을 쳐부순다는 줄거리야말로 12세 수준에 걸맞는다고 판단한 것이다.(“미래”라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대 배경만 “미래”일 뿐 그 밖의 것들은 다른 펄프류의 소설들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말 아침마다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만화영화에서처럼 악당의 이름과 생김새만 약간씩 바꾼 채 계속 써먹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과학소설을 사랑하는 이들도 “12”라는 숫자를 이용해서 반격에 나섰다. 눈 튀어나온 외계 괴물의 지구 침략, 처절한 전투 끝에 얻은 값진 승리, 마침내 찾아든 지구와 우주의 평화. 이런 재미를 즐기는 것이 뭐가 잘못된 일인가 하고 되물었다. 아직도 잃지 않은 꿈이 있고, 때묻지 않은 순수가 있고, 물들지 않은 상상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이인 열두 살! 그때 느끼는 “경이감(sense of wonder)”이야말로 과학소설의 정수(精髓)가 아닌가. 그런데 이를 추구하는 행위를 어찌 폄하(貶下)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여러 이론가들이 “경이감”을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도대체 “경이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언제 느끼는가, 왜 과학소설이 특별히 효과적으로 “경이감”을 주는가 하는 점들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신기한 것은, 우리가 예술작품을 비평할 때 내용물(contents)을 가지고 얘기를 하지, 그 내용물이 우리에게 주는 효과(effects)를 놓고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과학소설의 의의를 “경이감”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내용물이 아닌 효과에 초점을 맞추는 셈이 된다. 또 다른 예로는 공포소설을 들 수 있다).

“경이감”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사물이나 사건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경험할 때 우리가 느끼는 일종의 정신적인 “충격(shock)”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충격”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공포영화를 보면서도,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을 당했을 때에도 우리는 “충격”을 받기 때문이다. 토도로프(Tzvetan Todorov)라는 학자는 이러한 정신적인 “충격”을 기괴함에서 신기함에 이르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구분했다.

‘기괴함’ ‘환상적인 기괴함’ ‘환상적인 신기함’ ‘신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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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 (사실적)

과학소설이 주는 “충격”은 수동적인 기괴함에서 오는 감정이 아닌 호기심을 자극하는 “오, 놀라워라!”식의 신기함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그저 놀라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호기심을 동반한 신기한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귀신, 유령, 마법 등의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닌 자연적인, 과학적인 설명방식이 필요하게 된다. 과학소설이야말로 바로 거기에 딱 들어맞는 장르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 및 설명은 외계인, 광선총, 초광속 우주선 등의 신기한 사물이나, 시간여행, 제3차 세계대전,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 등의 신기한 사건들에 의존하는 충격요법에 속하는 과학소설들을 묘사하는 데 적합할 뿐이다. 과학소설이 주는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충격”은 그럴듯한 설명이 붙은 “신비함” 이상의 그 무엇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신비함” 이상의 그 무엇, 즉 “충격”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데에는 쿤(Thomas Kuhn)의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개념이 매우 유용하다. 패러다임이란 한마디로 세계를 바라보거나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패러다임은 개인의 독특한 개성을 뛰어넘어 한 사회나 시대를 망라하는 불문율과도 같은 성질을 지닌다.

과학소설이 주는 “충격”은 불문율처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가치체계와 세계관이 깨져나가면서 발생한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분짓는 잣대가 모호하다면? (필립 K. 딕의 『블레이드 러너』) 인류가 우주에서 유일한 지성체가 아닌 것이야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예 다른 외계 지성체에 비해서 열등한 존재라면? (아더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인류가 상상하기 힘들 만큼 전혀 새로운 존재로 진화한다면? (그렉 베어의 『블러드 뮤직』) 이러한 존재론적인 질문들은 독자가 익숙해져 있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그 순간 과학소설 독자는 “개념적 돌파(conceptual breakthrough)”를 성취하게 된다.

“개념적 돌파”는 독자를 기존의 신념체계로부터 떼어낸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와 유사한 경험을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외국여행을 갔을 때처럼 말이다. 분명히 사람이 사는 세상인데,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질 때, 일종의 공포감과 함께 정신적인 방향감각을 우리는 잠시 상실한다. 이때처럼 스스로가 “이방인”같을 때가 없었으리라. 그렇다. 믿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 또는 버렸을 때, 이를 대체할 만한 믿음직한 대안이 불쑥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모두 “소외감(estrangement)”을 느낀다(여기서 “소외감”이라고 옮긴 개념은 막스(Marx)의 “소외”와는 다른 개념임에 주의하기 바란다). 그러나 바로 이 “소외감”이야말로 우리가 “개념적 돌파”를 통해 뭔가 그 이상의 것을 찾아내기 일보 직전에 와 있다는 일종의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과학소설을 읽는 독자의 진정한 참여는 시작된다. “개념적 돌파”의 단서를 제공한 사람은 독자가 아니라 바로 소설을 쓴 작가이기 때문이다(책을 집어들었다는 행위만으로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너무 심하게 우기는 것일까?) 그러나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충격”을 받고, 그로 인해 “개념적 돌파”를 인식하면서, “소외감”에 몸을 떠는 그 순간부터 독자는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아무리 작가가 나름대로 제시하는 대안적인 패러다임을 읽는 데 불과하더라도 여기부터는 능동적인 판단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또한 바로 이곳에서부터 훌륭한 작가와 그저 그런 작가의 차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완전히 사라진 패러다임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논리적으로, 그리고 흥미롭게 제시할 줄 아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작가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개념적 돌파”가 불러일으키는 “소외감”은 사실 분명하게 선을 긋기 어려울 정도로 붙어 있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개념적 돌파”가 일어나는 그 순간 독자는 “소외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연속적인 현상을 우리는 한데 합쳐서 “인지적 소외(cognitive estrangement)”라고도 부른다. 과학소설을 읽는다는 지적인 활동을 통해 패러다임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에 따른 인식의 변화과정을 경험하는 과정 전체가 그 한마디 용어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특이한 것은 “인지적 소외”라는 딱딱하게만 들리는 지적 행위에서 “깨달음”에 접근하는, 때때로 “초월”에 비견할 만한 쾌락이 생성된다는 점이다(아, 교(敎)와 선(禪)이 골고루 섞인 과학소설이여!) 심각한 질문, 지적인 추론에 의해서 야기된 “경이감”에서 “개념적 돌파”를 거쳐 “인지적 소외”로, 철저하게 논리적인 과정을 밟아나간 끝에 도달한 우리의 독서경험은, 다른 종류의 문학에서는 얻기 힘든 독특한 “깨달음,” 즉 삶과 사회와 인류와 우주에 대한 한 차원 훌쩍 뛰어넘은 이해에서 오는 감동이 되는 것이다.

과학소설은 열두 살박이 수준의 장르라는 문제에서 시작해서 우리는 어느새 “인지적 소외”라는 골치 아플 것만 같은 개념과 그로 인한 감동의 단계를 훑어보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내용이 과학소설이 열두 살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로 나눠서 할 수 있겠다.

첫째, 과학소설은 분명 열두 살짜리에게나 어울리는 수준의 “경이감”을 자주 다루어 왔다는 점이다.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을 소설화한 여러 작품들, 카우보이가 말 대신 우주선을 타고 OK목장이 아닌 토성의 고리에서 벌이는 악당과의 전투를 담은 작품들이 지금도 넘쳐난다. 그러나 우리의 대답은 다행히도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둘째, 과학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경이감”의 수준은, 즉 “인지적 소외”의 질적인 다양성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감동의 특이함은 시대와 나이와 성별의 차이를 모두 끌어안을 만큼 크고 넓고 깊기 때문이다. 눈에 자주 띄는 것들이 하필이면 배트맨 만화이고, 「스타워즈」 가면이기에 많은 사람들은 과학소설의 수준을 모두 “12”에 맞추곤 한다. 하지만 그 “12”살에 맛본 과학소설의 유치찬란한 “경이감”에 맛을 들인 사람들 중에서는 35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며칠에 한 권씩 과학소설을 읽어치우는 사람이 있다. 유학을 가서도 열심히 과학소설을 읽고 모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보는 과학소설은 더 이상 유치하지 않다. 35세와 박사과정에 걸맞는 지적인 작품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은 12살짜리가 즐기는 과학소설을 무조건 폄하하지는 않는다. 12살짜리의 “경이감”이 35세 박사후보가 느끼는 “경이감”보다 못할 도덕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지적인 면에서 분명 어느 정도 떨어지는 면이 있다고 인정해도, 바로 그 12살 때의 경험이 수십 년 간 지속되어 온 지적인 즐거움, “인지적 소외”로 발전되어 왔음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독자 여러분이 판단하기 바란다.

이매진 칼럼: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 (2)

(2001년 04월 01일)

이매진 칼럼 (3) – 세상을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 과학소설과 판타지의 모호한 경계

『The Fafhrd & Gray Mouser』시리즈로 ‘검과 마법(Sword and Sorcery)’이라는 판타지의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Our Lady of Darkness』나 『Conjure Wife』와 같은 ‘도회성 판타지(urban fantasy)’의 선구자로 찰스 드 린트(Charles de Lint) 등의 현대 작가들보다 무려 30년 이상 앞서갔던 프릿츠 라이버(Fritz Leiber)는 원래 훌륭한 과학소설 작가였다. 『타우 제로(Tau Zero)』와 같은 하드 과학소설의 대가 폴 앤더슨(Poul Anderson) 역시 『The Broken Sword』나 『The King of Ys』와 같은 북구신화에 기반을 둔 판타지로 명성을 날렸다. 『어둠의 왼손(The Left Hand of Darkness)』과 같은 과학소설로 명성을 날린 어슐러 르귄(Ursula K. Le Guin) 역시 『어스시(Earthsea)』4부작 등의 수준 높은 판타지로 두 장르에서 골고루 사랑 받고 있으며, 『엔더(Ender)』시리즈로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오슨 스캇 카드(Orson Scott Card)는 ‘전원 판타지(pastoral fantasy)’인 『Alvin Maker』시리즈로 두 장르를 모두 석권하였다. 그밖에도 숱한 과학소설 작가들이 판타지에 손을 대었고, 또 현재도 여전히 두 장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실 이러한 추세는 1940년대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소위 ‘황금시대(The Golden Age)’의 중심 인물이었던 「Astounding」의 편집자 존 캠벨(John W. Campbell)까지도 1939년 「Unknown」이라는 자매 잡지를 만들고 휘하 작가들의 판타지 작품들을 실었다.

1960년대 톨킨(J. R. R. Tolkien)의 『반지 군주(The Lord of the Rings)』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까지 판타지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과학소설이나 공포소설 등의 여타 장르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장르로 남아 있었다. 더구나 우리가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수많은 아동문학(the children’s literature)에 이르면 판타지와 과학소설의 구분은 거의 불가능해지기까지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와 독자의 모습에 비추어 보았을 때, 분명 과학소설과 판타지는 상당히 유사한 장르임에 분명하다. 사실 두 장르를 확연히 구분 짓는 경계선은 어디에도 없다. 과학소설을 판타지와는 달리 과학과 기술이 세계와 인간을 바꾸는 동인(動因)이며 이를 외삽적인 기법을 이용해서 소설화하는 장르라고 고집을 부리다가는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품들의 9할을 잃게 된다. 그렇다고 과학소설 역시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인(supernatural) 현상이나 소재를 다루는 문학에 모두 포함된다고 주장하다가는 아예 구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경우 독자들은 자신이 어느 장르에 속하는 작품을 읽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장르를 더 선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사실 장르 안에서 장르를 읽는 법을 배운 독자들에게 과학소설과 판타지, 추리소설과 스릴러를 가르는 경계선은 모호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또한 ‘크로스오버’를 어디서건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에서 장르들 사이의 ‘크로스오버’와 마주친다고 해도 독자는 그저 어떤 요소가 더 강한가를 판단하여 스스로 장르 딱지를 적당히 매기면 된다. 아니, 딱지를 매기기에 앞서 재미있는 독서거리인지를 살피고 즐기면 그만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르문학을 더욱 차근차근 읽고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부터, 성격이 애매 모호한 책을 더욱 효과적으로 시장에 내놓음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고 싶은 출판사를 거쳐, 작품이나 작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해하려는 평론가들에 이르기까지, 과학소설과 판타지 또는 환상문학 전반(the fantastic fiction)과 사실적인 일반 문학(the mimetic fiction) 사이의 구분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소 도식적이지만, 간단한 도형을 통해서 두 장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대비하는 것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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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판타지는 광범위한 텍스트 중에서 환상적 또는 초자연적이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소재나 사건을 다루는 텍스트에 속한다. 그리고 과학소설은 판타지 안의 또 다른 부분집합이 된다. 하지만 세 개의 동심원들 사이의 경계선은 상당히 애매 모호하기 짝이 없다.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를 ‘희미한 집합(a fuzzy set)’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평론가는 그래서 판타지라는 ‘희미한 집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의에서부터 시작하기보다는 오히려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예로 듦으로써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서 판타지라는 부분 집합 속의 또 다른 부분 집합인 과학소설은 판타지에 비해서 구조적으로 상당히 명확한 성격을 보여준다. 현재의 과학 및 기술에 비추어 보았을 때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은 소재를 바탕으로, 명시적이건 암시적이건 간에, 적절한 외삽을 통해 과학적인 또는 역사적인 전제(premises)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위의 그림에서 과학소설을 판타지 속의 부분집합이라고 보기보다는, 과학소설이 차지한 동심원(즉 주황색 부분)을 뺀 도우넛 모양의(즉 녹색 부분만으로 이루어진) 영역을 판타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과학소설과 판타지를 환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소재를 다루는 데에서는 비슷하지만 소재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시각은 일견 매우 편리한 구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톨킨의 『반지 군주』나 루이스(C. S. Lewis)의 『나르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에 등장하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분명 불가능에 속한다. 반면에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의 『낙원의 샘(The Fountains of Paradise』이나 핼 클레멘트(Hal Clement)의 『중력의 임무(Mission of Gravity)』는 분명 현재 바로 이곳에서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과학소설은 정합성이 있는 반면에, 판타지는 황당무계한 사건들을 다루는 일장춘몽에 불과하다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판타지 작품에서 배경으로 삼는 세계 자체가 아무리 존재 불가능한 곳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등장하는 인물 등은 충분히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판타지는 과학소설이나 사실적인 일반 문학처럼 ‘내부적인 정합성(self-coherent)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클라크의 말처럼 ‘너무나 앞선 과학과 기술은 마법처럼 보인다’는 부분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진 울프(Gene Wolfe)의 『The Book of New Sun』시리즈나 마이클 무어콕(Michael Moorcock)의 『Dancers at the End of Time』, 그리고 발라드(J. G. Ballard)의 『크리스탈 월드(The Crystal World)』와 같은 ‘세상의 종말’ 또는 ‘죽어 가는 지구(Dying Earth)’를 다룬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십중팔구 현재의 우리 모습이나 현실과는 너무나 틀려서 마치 완전히 새로 창조한 판타지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을 주는 과학소설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앤 매카프리(Anne McCaffrey)나 앙드레 노턴(Andre Norton) 등의 작품에서처럼, 칼싸움이 난무하고, 드래곤이 불을 뿜지만 나름대로 그 배경과 인과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작품들은 과학소설인 듯 판타지적인 느낌을 강하게 준다. 게다가 팀 파워즈(Tim Powers), 제임스 블레일락(James Blaylock), 조나산 레셈(Jonathan Lethem), 조나산 캐롤(Jonathan Carroll) 등의 과학소설, 판타지, 공포 쪽을 능수 능란하게 넘나드는 작가들을 마주치면 장르의 구분 자체가 혼란스러워질 뿐만 아니라, 존 드릴로(John De Lillo), 존 바스(John Barth), 커트 보네거트 (Kurt Vonnegurt, Jr.), 그리고 토마스 핀천(Thomas Pynchon) 등의 ‘슬립스트림(the slipstream)’ 계열 또는 ‘우화적인 작가(the fabulist)’들까지 가세하면, 환상적이냐 아니냐, 불가능한 일이냐 아니냐에 따라 장르를 구별하는 짓은 거의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앞에서 언급한 기본적인 구분법이 세계의 존재 또는 작품의 배경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두 번째 방식은 두 장르가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주안점을 둔다. 즉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두 장르의 시발점은 같은 길에서 시작하는 듯 보인다. 즉 과학소설이건 판타지이건 지금껏 우리가 익숙하게 살던 곳과 경험이 아닌, 뭔가 기이한 장소나 사건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기이한 장소는 독자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또는 깨달음을 주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다. 즉, 주변환경의 이질성에 대한 주인공의 ‘인식(recognition)’은 새로운 반응을 이끌어내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지적했듯이, 자꾸 더 멀리, 더 신기한 장소를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의 호기심을 북돋우려 하는 풍조 , 과거에는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이나 아마존의 여전사 부족이면 충분하던 것이, 이제는 머나먼 은하계와 기괴한 외계 지성체로 뒤바뀌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기이한 장소 이외에도 주인공들을 모험의 길로 내딛게 만드는 방식은 더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기이한 사건은 일어날 수 있기 마련이다. 이런 방식은 주로 공포소설 쪽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등장인물이 거주하는 세계 자체의 기이함이 아닌 평범한 세계에서 기이하며 설명할 수 없는 외적인 힘의 작용으로 사건이 벌어지는 경우가 좋은 예이다.

스티븐 킹(Stephen King)이나 램지 켐벨(Ramsey Campbell) 등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멀쩡하고 평범한 세계에 섬뜩한(hideous)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판타지는 공포소설보다 그런 면에서 범위가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톨킨 류의 무대가 되는 세계 자체가 일상생활과는 이질적인 ‘하이 판타지(high fantasy)’는 물론이거니와, 평상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특이한 사건을 다루는 ‘로우 판타지(low fantasy)’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high나 low와 같은 수식어가 고급이냐 저급이냐의 질적인 차이를 따지는 것이 아님에 주의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 또는 무대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다는(the world-building) 의미에서 ‘하이 판타지’는 과학소설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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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판타지는 과학소설과 마찬가지로 기이한 환경과 사건에 의해서 등장인물이 새로운 ‘인식’에 직면하고 이에 따라 행동을 개시하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어떤 식으로 행동하느냐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과학소설에서는 주변환경의 첨예한 ‘인식’이 ‘개념적 돌파(conceptual breakthrough)’로 이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를 수행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도구는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이며 그 도구의 길잡이는 외삽력(extrapolation)과 이성(reason)이다.

새로운 환경과 사건은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 넣는다. (제임스 건(James Gunn)이 과학소설을 ‘비범한(extraordinary)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비범한 사건을 다루는 문학’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위기를 맞은 주인공은 기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물론 처음에는 실패한다. (첫 시도에서 성공한다면 소설로서의 의미가 없어진다. 또한 몇 번 실패하는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오히려 고리타분한 방식의 해결책은 위기를 심화시킨다. 결국 주인공은 그의 손에 쥐어진 기존의 과학과 기술을 도구로 하지만, 이성을 통해서 이러한 도구나 지식을 외삽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즉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으로 응용함으로써만 위기에 맞대응할 수 있게 된다.

이와 다르게 판타지는 아주 색다른 방식으로 위기와 대결한다. ‘하이 판타지’이건 ‘로우 판타지’이건 판타지의 주인공은 위기를 ‘운명(destiny)’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다. 존 클루트(John Clute)와 같은 평론가들이 판타지의 특성을 ‘내용(contents)’이나 ‘효과’ 보다는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주제(motifs)’로 파악하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과학소설처럼 초현실적인 또는 환상적인 사건이나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판타지는 순환적인 역사관나 선과 악의 끊임없는 조우에서 잘 나타나듯이 일종의 ‘패턴(the patterns)’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패턴’의 대표적인 예는 ‘표상(the emblems)’이다.

‘표상’은 때로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지닌 반지, 영생(永生)의 잔, 승리의 칼, 사랑의 정표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위기’에 맞서 싸우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기도 한다. 즉 일종의 ‘통과의례(the rite of passage)’인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모은 로저 젤라즈니(Roger Zelazny)의 판타지 『앰버』시리즈에서 주인공 코윈(Corwin)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패턴’이라는 이름의 복도를 걷는 장면은 ‘더욱 진정한 자신(the truer self)’에 접근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판타지는 내적인 재발견이나 재탄생, ‘패턴’과의 재결합 또는 이해를 통해 ‘운명’적으로 주어진 ‘위기’에 대응한다. 판타지에서 묘사하는 ‘위기’의 해결책은 훨썬 더 뉘앙스가 풍부하고 신화적이며 비유적인 셈이다.

물론 과학소설에서건 판타지에서건 주인공은 ‘위기’와의 대결을 통해 변화한다. 그러나 두 장르가 다루는 ‘변화’의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다. 판타지에서 주인공은 ‘운명’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위기’를 통해 세계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훨씬 가깝게 다가선다. 즉 ‘동화(同化, assimilation)’ 또는 ‘적응(adaptation)’을 통한 변화를 추구한다. 이에 비해서 과학소설은 기존의 관념을 깨는 능력, 세계를 바꾸는 과업을 주인공에게 더 세게 요구한다. 과학소설에서의 주인공은 세계를 바꿈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며 그 과정에서 새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의 변화는 ‘동화’나 ‘적응’ 보다는 ‘진화적(evolutionary)’인 성격이 강하다. 그렉 베어(Greg Bear)의 『블러드 뮤직(Blood Music)』이나 『Darwin’s Radio』, 그렉 이건(Greg Egan)의 『Teranesia』등에서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새로운 형태의 인류로 탈바꿈하는 모습은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소설의 범주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판타지 독자들에게까지 널리 사랑 받고있는 프랭크 허버트(Frank Herbert)의 『듄(Dune)』 시리즈에서조차 사막의 황제는 인간과 모래송어의 진화적인 결합을 시도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소설과 판타지의 유사한 듯 다르고, 다른 듯 비슷한 모습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여러 견해들은 복잡다기하게 제시되어온 숱한 이론들 중 아주 기본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또한 이러한 간략한 소개성 글의 원래 목적은 독자 스스로의 경험과 고찰을 통해서 언제나 미묘하게 움직이고 탈바꿈하는, 장르들 사이의 경계를 이해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작품이 과학소설인지 판타지인지를 따지는 행위는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껏 읽은 작품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동시에 앞으로 읽을 작품들에 대한 이해를 넓고 깊게 하는 데 보탬이 될 경우에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소설과 판타지의 구분은 장르 문학답게 독자의 소속의식에 의해서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필자는 과학소설보다 판타지를 훨씬 더 많이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스스로를 판타지 독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과학소설 한 권에 판타지를 최소한 서너 권씩 읽으면서도 늘 스스로를 과학소설 팬이라고 믿어왔으며, 또 과학소설 공동체에서 생활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identity)’은 거의 대부분의 장르 독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이기도 하다. 물론 바로 이러한 독특한 자세로 인해서 제프리 포드의 『골상학(Physiognomy)』시리즈나 패트릭 올리어리(Patrick O’Leary)의 『선물(The Gift)』과 같은 세계환상문학상(the World Fantasy Award)를 타거나 후보작에 올랐던 판타지 소설들을 과학소설처럼 읽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소설 골수 팬으로 자부하면서, 과학소설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는 판타지 작품을 과학소설 또는 ‘사이언스 판타지(Science Fantasy)’로 아전인수격으로 침소봉대해가며 읽는다고 해도, 종국에 가서 바뀌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바로 독자 자신이다. 과학소설을 판타지로 읽건, 판타지를 과학소설로 읽건, 바로 읽고 느끼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우리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새롭게 뒤바뀐 시각과 넓어진 인식의 지평은 앞으로 읽을 새로운 작품을 보는 눈을 바꾸는 동시에 우리의 인생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한다. 그 풍요로움의 성격이 틀리다는 것은 그러므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바로 장르문학이 풍요로움을 얼마나 다양하게 제공하며, 또 이를 우리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받아들이느냐하는 점일 것이다. 더욱 다양한 방식의 시각을 제공한다는 사실 자체로 이미 다양한 장르의 존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소설과 판타지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더욱 크고 중요한 문제인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또는 ‘해석의 지평’을 넓히는 문제로 귀착된다. ‘해석의 지평’을 어떤 식으로든지 제한하는 일은 그러므로 철저하게 지양하고 응징해야 할 문제가 된다. 소위 순수문학 또는 일반문학의 교조주의적 태도 및 자세가 우리 독자의 상상력과 해석의 지평을 어떤 식으로 제한하는지, 거기에 대응하는 과학소설의 모습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자.

이매진 칼럼 –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 (3)

(2001년 04월 30일)

이매진 칼럼 (4) – 복거일과 이영수의 차이: 과학소설과 주류문학의 구분

“주류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는 정치적인 편가르기

“과학소설(SF)을 포함해서 모든 “장르문학”이 “주류문학” (또는 본격문학, 순수 문학 또는 문학성에 초점을 맞추는 문학) 쪽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조선일보 5월 7일자에는, 7인으로 구성된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가 후보작을 논의하는 과정을 기사로 실었다. 이 기사가 특히 우리 장르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소위 주류문학에서 일부 작가들 및 평론가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편협한 자세로 문학 일반을 다루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단(文壇)의 중심부에 있다고 자처하는 소수의 작가들 및 평론가들이 어떤 문학 작품이 어느 장르에 속하는지 얘기할 때 대부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일방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하리라.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나왔을 때, 장르문학 (특히 과학소설) 독자들은 금새 이 작품이 “대체역사(alternate history)”에 속하는 과학소설(SF)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최근 시공사에서 번역 출간한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SF 고전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에 비해서 전혀 손색이 없으며, 오히려 여러 면에서 더 훌륭하다는 평을 듣는 『비명을 찾아서』는 그러나 주류에 속한 문학평론가들에 의해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주류문학에 속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이 문학성도 높을 뿐만 아니라, 주제의식과 역사의식도 투철하며, 읽는 재미도 만끽하게 할만큼 어느 모로 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장르문학에 뿌리를 둔 작품이 훌륭하면 당연히 주류문학에 속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대중문학, 좀 더 심하게 얘기하면 쓰레기 같은 삼류소설로 치부하는 편협한 태도는 늘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Djuna라는 통신상의 필명으로 더 유명한 『나비전쟁』등의 작가 이영수의 장르적인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의 경우에는 조금씩 관심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담론(談論)의 외곽을 돌고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영수의 작품이 나날이 성숙하는 한, 어느 날 갑자기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와 같은 자칭 타칭 문단의 주류세력이 불쑥 그의 작품을 주류문학이라고 선언하는 우스운 꼴을 보이리라는 것은 불 보듯 자명한 일이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한 번 주류문학의 “고귀한 써클”에 입성(入城)하게 되면, 다음 번에 작가가 아무리 장르문학에 속하는 작품을 내놓아도, 비평가들은 그 작품을 주류문학에 속한다고 우기기 시작한다. 명백한 과학소설 『하녀이야기(Handmaid’s Tale)』로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가 유명한 상을 휩쓸고, 주류문학에 속한 비평가들의 칭송이 하늘을 찌르게 되면서, 사람들은 그녀를 더 이상 과학소설 작가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과학소설임에 명백한 작품을 계속 써도…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더 훌륭한 작품을 쓰더라도, 애트우드처럼 주류문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진 울프(Gene Wolfe)나 존 크라울리(John Crowley)와 같은 장르 작가의 작품들은 여전히 홀대를 받는다.

그러므로 “주류(또는 본격)”이냐 “장르(또는 대중)”이냐의 편가르기는, 사실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편가르기에 가담한 이들의 이익을 가르는 데에 쓰이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문화권력”의 핵심 세력으로 자처하는 일부 (또는 대다수) 편협한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편가르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키우기 위해서, 예술로서의 문학이 뿌리를 두고 있는 자유로운 상상력마저도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나누고 왜곡시켜 왔으며,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종자”가 틀린 과학소설

그러나 주류와 장르의 구분을 정치적인 “개싸움”으로 단정짓다보면, 주류문학과 과학소설이라는 장르문학 사이의 진정한 차이를 놓칠 수가 있다. 주류문학과 과학소설이라는 식의 편가르기는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편싸움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두 부류의 문학 장르가 서로 다른 “종자(種子)” 또는 “씨알”이라는 면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종자론”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유치하지만 간단한 비유를 들어보자. 주류문학과 과학소설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르게 생긴 “칼”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류문학이 과일이나 채소를 다듬는 칼이라면 과학소설은 고기 써는 칼이라는 식이다. 어떤 칼이건 숫돌에 가는 사람의 정성과 그 칼을 휘두르는 이의 솜씨에 따라서 성능은 천차만별이다. 과일칼이 정말 날카롭고 칼 쓰는 이의 솜씨가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지경에 이르렀다면, 과일칼로도 고기를 썰 수는 있는 셈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나 똑같은 공력(功力)을 지닌 두 고수(高手)가 각자 과일칼과 고기칼을 들고 암소 한 마리를 잡겠다고 설쳐대는 경우, 살점은 물론이거니와 두꺼운 허벅다리 뼈까지 동강낼 수 있는 고기칼을 든 사람이 훨씬 유리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당연히 뒤따르는 생각은, 결국 무엇을 썰고 싶은가에 따라서 칼쓰는 이의 선택이 결정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리라. 맞는 말이다. 채식주의자야 평생 고기 만질 일이란 없을 터이니까 고기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법을 익힐 까닭이 없다. 한 끼만 고기를 걸러도 속이 허한 사람에게야 과일칼은 보기만 해도 답답한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다. 즉 작가의 취향에 따라서 주류인가 장르인가의 기본적인 출발선이 결정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시각은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주장과 곧바로 연결된다. 이영수가 「문학과 사회」 최근호에서, 과학소설을 비롯한 여러 장르문학을 쓰고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소위 주류문학(본격문학) 쪽의 편협한 시각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 것도 이러한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작가의 취향에 따라서 칼을 선택한다는 식의 생각과 어느 칼을 쥐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등급을 매기지 말자는 항의는, 매우 민주적인 항변일지는 몰라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즉 세계가 점차 고기칼에 적합한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을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유아독존(唯我獨尊)으로 세상을 살고 작품을 쓰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시대가 던지는 문제점을 개인적으로 고민하면서 이를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러므로 시대와 사회가 작가에게 던지는 문제점이 10년 전, 50년 전과 달라졌다면? 야채의 중요성이 자꾸 줄어들고 이제 고기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간다면? (이런 비유를 야채가 고기보다 몸에 좋다는 영양학적인 언변으로 받아치는 독자는 없을 것으로 믿는다.)

“칼”이면서 “창(窓)”인 과학소설

과학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 완전히 달라졌다고 본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으로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자체가 달라졌다는 말이다.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우리 인류는 과학기술이 물질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면까지도 얼마나 급격히 바꿀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변화 자체가 늘 좋은 쪽으로만 나타났다는 얘기는 아니다.) 수천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지고지순한 원칙과 생각과 믿음이 과학기술의 변화에 영향을 받아 눈부시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소설의 통찰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세상이야 원래 늘 변하던 곳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관습과 생각도 바뀌기 마련인 것을 누가 모르랴. 또 미래에도 세상은 조금씩 변할 것이므로 이에 따라 사람들도 조금씩 계속 변할 것이라고 누가 예측하지 못하랴. 과학소설은 두 가지 면에서 이렇게 뻔한 진단과 예측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첫째는 그 변화의 속도가 점차 빨라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변하기는 변하되 그 속도가 지금껏 인류가 경험했던 한계를 넘어 어지러울 만큼 빨라질 것이고, 또 점점 더 빨라지는 추세에 있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바로 그 변화의 동인(動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야말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라는 점이다. 막스(Karl Marx)가 생산양식이라는 하부구조가 변함에 따라 정치 사회 문화적인 상부구조가 변한다고 주장했음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소설은 과학과 기술의 변화와 그 눈부신 가속력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며 바로 그 요인에 발맞추어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변한다고 주장한다.

또 하나의 무시할 수 없는 덕목, “재미”

게다가 이러한 이론적인 분석을 넘어서서, 과학소설을 포함한 장르문학은 소위 일반 주류문학이 오래 전에 내팽개친, 문학의 여러 덕목(德目)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덕목인, “재미”마저 갖추고 있다. “재미”를 중시한다는 점이 속되고 유치한 상업화의 벼랑까지 내몰린 끝에, 요즘 서점가를 장식하고 있다는 소위 “환협지”로 변질되었다는 지적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장르문학은 기본적으로 대중문학의 성격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은 문학 장르이다. 여기서 “대중”이라는 말이 앞에 붙는 주된 이유를 “재미”를 무시하지 않으려는 (즉 숨 막히게 재미있는 “이야기”로써의 덕목을 저버리려하지 않는) 장르문학의 특성이라고 보지 않고, 오히려 속되고 유치한 몇몇 사생아적인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뭉뚱그려 몰아치려는 짓은 음모에 불과하다.

아무도 (특히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에 속한 인사들이) 일간지(日刊紙)에서 매년 벌이는 유치한 습작에 불과한 “신춘문예 당선작”들로 한국문학의 현주소를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새싹에 불과하고 그 새싹들이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협지” 몇 편을 가지고, 장르문학 (또는 대중문학) 전체의 미덕을 깡그리 무시하려드는 언사는, 신춘문예 당선작 몇 편을 놓고 한국문학의 죽음을 논하는 행위처럼 어리석고 편협한 코미디에 불과하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의 어리석은 언사는 그들이 장르문학(또는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대중문학)에서 지금껏 쏟아져 나온 진정한 걸작들을 단 한 편도 읽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이를 (앞서 지적한 바대로) 장르문학이 아닌 척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환협지”이건 “신춘문예 당선작”이건 모두 별로 잘 쓴 글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재미마저도 없는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설 자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낡은 “칼”에서 새로운 “레이저 광선”으로

앞서 우리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비유를 통해 과학소설을 칼로 환치시켜 보았다. 그러나 과학소설에는 고기칼이라는 도구, 즉 어떤 소재를 특이하게 다루는 연장 이상의 의미가 있다. 주류문학이 이 시대와 사회를 보는 작가의 문제의식과 독특한 해결방식을 포괄하듯이, 과학소설은 뭔가를 자르고 썬다는 해결방식이면서 동시에 도대체 무엇을 자르고 썰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길잡이이자 문제가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인식의 창(窓)”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학소설은 또 다른 경치를 보여주는 단순한 창이 아니다. 주류문학이 우리의 사는 집의 둘레를 다채롭게 보여주는 사방으로 난 창이라면, 과학소설은 우리가 사는 집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집을 보여주는 창이 된다. 집 안쪽에서 밖을 내다보는 창뿐만이 아니라, 언덕 너머에서, 바다 건너에서, 달 기지에서, 태양계 바깥에서, 은하계 건너에서 우리의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는 창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앞의 유치한 비유를 좀더 과학소설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즉 주류문학이 전통적인 형태와 기능을 지닌 보통의 “칼”이라면, 길게 날이 선 금속성 물질이 앞쪽에 달렸고, 플라스틱, 고무 또는 나무로 칼잡이가 쥘 수 있는 손잡이가 붙은, 자르고 써는 데 사용하는 물체라고 한다면, 과학소설은 “레이저 광선(laser beam)”이 된다. 레이저 광선은 물체를 자르고 써는 경우(레이저 절삭기 등)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당신과 내가 의견을 나누는 매체가 되기도 하고 (광통신 수단), 음악을 재생하거나 정보를 쓰고 읽는 도구가 되기도 하며 (CD-RW), 시력을 높이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레이저 안구수술), 최악의 경우에는 적을 무찌르는 무기가 된다 (레이저 광선총 또는 위성을 통한 미사일 요격시스템). 뿐만 아니라, 고도로 발달한 현대 기계공학에서 정밀 측정기기의 작동에 빠짐없이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다방면에 걸친 레이저의 용처(用處)는, 다시 비유에서 현실로 논조를 바꾸어 생각하면, 과학소설이야말로 시대와 사회를 진단하는 정밀 측정기기, 그 안에서 울고 웃는 개인들 사이의 광통신 수단, 삶을 경제적 문화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오락과 정보의 전달과 재생, 어머니 지구를 지키는 미사일 요격 시스템, 인류가 은하계로 뻗어나가는 미래에 대한 전망과 꿈, 이미 지나갔으되 여전히 타당한 과거의 재해석을 위한 근거, 지금 이 순간에도 순식간에 미래에서 과거로 바뀌고 있는 현재에 대한 주춧돌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과학소설의 기능과 역할은, 결국 모든 “가능태”를 꿈꾸는 “열린 자세”의 총합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과학소설 독자들은, 4천 7백만에 달하는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갈데 없이 한강공원에 나앉아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소주잔이나 들이키고 있을 때, “달빛이 두 배로 밝은 밤하늘”을 걷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꼭 우리의 어머니 지구 위를 거닐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판단의 유보”를 기꺼이 수행한다. 그래서 과학소설 독자들은, 2001년의 한국사회가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인 “성(性) 정체성”에 여전히 집착할 때,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어둠의 왼손(The Left Hand of Darkness)』이나 니콜라 그리피스(Nicola Griffith)와 스티븐 페이겔(Stephen Pagel)이 편집한 『Bending the Landscape』를 읽으면서, 제 3의 성은 물론이거니와 스펙트럼처럼 무한대로 펼쳐지는 “성 정체성”에 대해서 숙고한다. 그래서 과학소설 독자들은, 2001년의 한국사회가 여전히 분단의 현실을 볼모 삼아 양심적 병역기피자들을 법정에 세울 때, 조 홀드먼의 반전(反戰) 과학소설 『영원한 전쟁(Forever War)』과 러시어스 셰퍼드(Lucius Shepard)의 『The Jaguar Hunter』를 통해, 그리고 조프 라이먼(Geoff Ryman)의 제 3세계 문제를 제대로 다룬 『The Unconquered Countries』를 통해, 전쟁과 수탈, 억압과 광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러므로 과학소설은 여러 가지 새로운 “썰 거리”를 기존의 문학 장르들 보다 수월하게 풀어낼 수 있는 태생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과학소설이라는 장르 문학이 다른 문학 장르의 작품들보다 언제나 훌륭한 작품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의 90퍼센트는 쓰레기이듯이, 과학소설 역시 그 중의 90퍼센트는 쓰레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당장 과학소설이라는 레이저 광선이 기존의 주류문학이라는 칼이 하던 역할을 완전히 떠맡아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틀린 점을 인정할 때, 아무리 레이저 광선이 편리해도 여전히 주머니 칼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웬만한 레이저 광선보다 칼을 더 능숙하게 쓰는 사람은 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칼, 돌도끼를 휘두르던 시절이 금속제 칼과 도끼에게 밀려나듯이, 칼은 조금씩 조금씩 과거에 대한 향수(鄕愁)나 독특한 취향을 상징하는 구시대의 유물(遺物)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것이다.

과학소설의 “열린 자세”

그렇다면 과학소설이 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다는 레이저 광선과도 같은 도구로써의 우월함과 4차원적인 창과도 같은 열린 시각과 자세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모든 작품(텍스트)에는 “해석의 여지 또는 공간(interpretive space)”이 있다고 한다. 이 해석의 여지를 어떻게 메꾸는가는 (비평가를 포함해서) 우리 독자의 손에 달려 있다. 과학소설은 바로 이 “해석의 공간”을 채우는 방식 자체에 “열린 시각과 자세”가 내재해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해석의 공간”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다양하게 채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A라는 닫힌 시각에서 B라는 또 다른 닫힌 시각으로 바꾸는 행위로 착각하면 곤란하다는 점이다. “해석의 공간”을 존중한다는 말은, 다양한 해석의 방식이 공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어떤 독자나 비평가가 A라는 식으로 작품을 해석한다고 하자. 그런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A만이 올바른 해석방법이라고 주장한다면? 바로 그 순간, 해석의 공간은 교조주의적인 시각 하나만으로 가득 찬 무미건조하고 숨막힐듯한 교과서가 되고 만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죽음이란 상대적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꼭 정신의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는 없지요.”

“그럼 지금 유령이신가요, 페트렌코 교수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투신 자살 따위로 쉽게 죽을 사람처럼 보입니까?”

“투신 자살은 모르지만 화장터에서는 분명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이영수 님이 「이매진」에 연재중인 소설 『몰록』의 제 15장에서 옮겨온 위 대화를 읽는 방식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일반 주류문학 독자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십중팔구 이렇게 생각하리라. “아!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영원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나보다. 어라? 그런데 투신 자살을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서 대화를 나눌까? 이거, 공포소설 아니야? 아니면 요즘 조간신문에서 떠들던 삼류 판타지들처럼 유령이 출몰하는 이야기 같은데. 에이, 이런 걸 누가 읽어!”

장르문학 독자들은 어떻게 이 대목을 받아들일까? 판타지 독자라면 투신 자살에도 불구하고 부활한 등장인물의 의도나 염원(念願)이 무엇일까 궁금해 할 것이다.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원한이 사무쳤거나, 못다 마친 일을 끝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페트렌코 교수가 부활했으리라고 기대한다. 이제 뒷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는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소설 독자라면 반응은 또 다를 것이다. “오호라! 작품 속의 세계에서는 뭔가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나보군. 일종의 ‘나노머신(nano-machines)’을 사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화학적으로 뇌의 활동을 잠시나마 소생시킨 것일까? 그도 아니면 분자생물학적인 방법일지도 모르지. 만약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있다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생길텐데. 범죄수사가 완전히 틀려지겠군. 유산 상속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지?” (사실 죽은 자의 부활 발생하는 복잡하면서도 흥미롭기 짝이 없는 문제들은 로버트 셰클리셰(Robert Sheckley)의 『불사판매주식회사(Immortality, Inc.)』나 그렉 이건(Greg Egan)의 『Distress』등에서 이미 철저하게 다뤄진 바가 있다.)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 장르독자들이 어떤 식으로 배경을 추측하고 뒷이야기를 예견하는지는 조금씩 틀리겠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장르독자들은 있는 그대로 작품을 읽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문학작품을 읽는 법을 배웠듯이 작품을 획일적으로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페트렌코 교수가 부활했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그들은 초자연적인 소생의 가능성과 과학적인 부활의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들어간다. 물론 위 대목만 보자면, 화자(話者)가 겪는 일종의 환각상태일 수도 있다. 또는 경찰직에 오래 몸담은 베테랑 수사관이 그렇듯이 머리 속에서 탐정놀이를 하고 있는 대목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 해석의 공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열린 자세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특히 과학소설 독자들은 어떤 작품을 읽을 때 작품이 얘기하는 내용의 세계를 머리 속에 그려 나가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그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은 경험과 지식과 이상(理想)에 따라서 틀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창조적인 독서 방식이, 즉 자유롭게 그리고 다양하게 “해석의 공간”을 채우는 노력이, 주류문학에서 흔히 말하는 창조적 독서 방식과 틀리다는 것이다. 주류문학에서는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행동하고 생각하는 배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채, 그 주인공들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주어진 환경 내에서 반응하는가 또는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핀다. 즉 주류문학 작품이 씌어진 시공간 배경을 주어진 것으로 인정한 채, 그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싸우고 웃고 울고 죽었는가를 알고자 책을 읽는다. 그러나 과학소설에서는 등장인물과 배경이 모두 변수이다. 배경의 해석에 따라 등장인물의 성격이 달라지고, 등장인물의 행동이 배경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열린 시각이 부족한 독자, 판단의 유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기존 문학에 익숙한 비평가들이 과학소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그에 비해서, 과학소설 독자들은, 즉 과학소설 작품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독자라면 주류문학이건, 사실적인 순수문학이건, 또는 본격문학이건 간에 읽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미 열린 시각, 유보된 판단으로 읽는 과학소설의 독서행위에는 기존의 문학을 읽는 방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가지 시각으로 문학 작품을 읽는데 익숙한 일반 독자들과 비평가들은 지금껏 익숙해져 있는 독서습관을 크게 바꾸지 않는 이상, 과학소설 작품을 읽기 힘들다.

맺으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소설이라는 장르문학이 일반 주류문학과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살펴보았다. 과학소설과 주류문학으로 나누는 행위는 작가의 쓰고자 취향과 독자의 독서 취향에 따른 편가르기에 불과하다는 점이 분명 있다. 아무리 스페이스 셔틀이 민간인을 태우고 우주비행을 하는 세상에도 빅토리아 시대의 자잘한 심리묘사를 더 즐거워하는 작가나 독자는 늘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소설은 이러한 다양한 취향을 넘어선다. 기존의 문학이 접근할 수 없었던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도구가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과학소설은 과거와 다른 현재를 다루는 도구를 넘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열린 자세가 된다. 과거에 뿌리를 둔 현실을 새롭게 다루려는 노력은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무한한 다양성을 인식하는 초석(礎石)이 된다. 작가는 물론이고 독자까지도 해석의 지평을 넓히려는 노력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과학소설을 통하여 낡은 문제를 새롭게 보는 법을 배우게 되며, 나아가서는 새로운 문제가 무엇인지까지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열린 자세로 읽는 장르문학 특히 과학소설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무엘 딜레이니(Samuel R. Delany)의 “일반문학을 과학소설처럼 읽자”는 말을 다시 한 번 의미심장하게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그 말은 결국 열린 자세로 작품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며, 기존의 관습과 다른 시각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지금껏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독특한 상상력과 논리로 기존의 아름다움을 재음미하고 새로운 진리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짜릿한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매진 칼럼 –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 (4)

(2001년 06월 01일)

이매진 칼럼 (5) – 핵폭탄에서 컴퓨터까지: 과학소설은 점쟁이 역할을 해야 하는가?

과학소설은 점쟁이 역할을 해야 하는가? 과학소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개 몽상에 불과하지만, 아주 가끔씩 예언처럼 들어맞을 때도 있다.

브루스 스털링(Bruce Sterling)

과학소설의 예측력에 대한 깨지지 않는 신화

과학소설이란 지금껏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은 과학·기술적 사실 또는 가설을 바탕으로 외삽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이 인류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추론함으로써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문학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외삽을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예측(豫測)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소설 작가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했는가를 판단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예측이란 원래 초기조건에 크게 좌우되기 마련이며, 심한 경우에는 아예 똑같은 초기조건을 놓고도 전문가들 사이에 완전히 다른 예측이 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을 보면, 예측이란 애당초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러 과학소설 작가 및 팬들은 과학소설의 참된 미덕(美德)이 ‘미래의 올바른 예측’에 있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그러면서 드는 예들을 살펴보면, 정말 찬탄을 금치 못할 만큼 훌륭하게 맞아떨어진 예측이 꽤 많다. 허버트 G. 웰즈(H. G. Wells)가 예견한 탱크,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이 예측한 항공기를 이용한 우편배달, 로버트 하인라인(Robert A. Heinlein)의 물침대와 리모콘, 카렐 차펙(Karel Capek)의 로봇,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의 통신 위성, 등등.

특히 단골손님격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예로는 우주선과 원자폭탄을 들 수 있다. 우주선을 이용한 우주여행이야 과학소설에 워낙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므로 식상할 정도이다. 게다가 과학소설 작가들이 묘사한 우주선과 이를 이용한 우주여행 방식이 기술적인 측면에서 모두 그럴듯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원자폭탄의 경우에는 문제가 조금 다르다. 1944년 과학소설 전문 잡지 ≪어스타운딩(Astounding)≫ 3월호에는 클리셰브 카트밀(Cleve Cartmill)의 단편 “Deadline”이 실렸다. 카트밀은 우라늄-235를 이용해서 어떻게 원자폭탄을 만들 것인가는 물론이거니와, 왜 원자폭탄을 만들게 되었는가라는 세계 정세까지도 실제 역사와 흡사하게 예측하였다. 이 작품이 발표 된 직후, 당시 극비리에 원자폭탄을 제조하고 있던 미국 정부는 특별조사를 벌여 저자인 카트밀을 소환하기까지 했다. (당시 맨하탄 프로젝트에 가담했던 과학자 중에는 ≪어스타운딩≫을 즐겨 읽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하루는 점심 시간 중에 개발중인 원자폭탄 얘기가 나오는 단편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를 전해들은 보안 관계자는 허둥지둥 상부에 보고를 했고, 결국 비밀리에 카트밀이 소환되기까지 한 것이다.)

과학소설은 정말 백전백승의 예측력을 자랑했는가?

그러나 과학소설이 보여준 빛나는 무공훈장에 너무 심하게 도취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과학소설 작가들은 우주여행과 우주선에 대해서 숱하게 우려먹었지만, 우주여행이라는 프로젝트가 국가적인 규모에서, 그것도 미국 및 소련과도 같은 초강대국만이 엄두를 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규모로 펼쳐지리라는 점은 예측하지 못했다.

하인라인의 경우에는 1947년 『Rocketship Galileo』에서 천재소년 몇 명이 뒷마당에서 뚝딱거리며 만든 우주선을 발사한다는 작품을 쓰기까지 했다(후일 조지 팔(George Pal)에 의해서 『Destination Moon』으로 영화화되기도 한 이 작품으로 하인라인은 사후 NASA로부터 메달을 받기도 했다). 자신의 소설이 탁월한 과학적 정확성에 근거해 있음을 늘 자랑하면서, 웰즈의 과학소설이 엉터리라고 자주 비난했던 줄 베르느(Jules Verne)는 거대한 대포(大砲)를 이용해서 우주선을 달로 쏘아 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계산대로 우주선을 발사했다면 우주선은 지구 상공 20 킬로미터까지 떠올랐다가 다시 추락했을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승무원들은 우주선 안에서 발사 1초만에 무지막지한 중력 피떡이 되어 사망했을 것이다.

무공훈장을 반납해야 할 만큼 치명적인 누락의 예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798년 영국의 토마스 맬더스(Malthus)는 ‘자원은 산술적으로 증가하고,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리라는 우울한 예측을 제시했고, 이는 1966년 해리 해리슨(Harry Harrison)의 『Make Room! Make Room!』에서 3천 5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1인당 한 평(坪) 남짓한 맨하탄에서 북적대면서 인육(人肉)을 먹는 섬뜩한 묘사로 절정에 달하였다(이 작품은 후일 『Soylent Green』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그러나 (최소한 정치와 경제가 개판 일보 직전이 아닌 지역과 국가에서) 피임도구의 보편화는 걷잡을 수 없던 인구폭발을 성공적으로 진화할 수 있었고, 현재는 오히려 인구의 급격한 고령화가 여러 나라에서 더 큰 우려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인구 증가 그 자체보다 더욱 시급한 문제는 그 많은 인구가 쏟아내는 ‘쓰레기 문제’라고 하겠다.

그 뿐만이 아니다. 차펙에서 시작하여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손에 넘어온 로봇은 인류에 대한 반역이나 구원을 생각하기는커녕 여전히 자동차 공장에서 열심히(!) 노력봉사를 하느라 바쁘다. 게다가 20세기 후반 이후 인류 문명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인 컴퓨터의 발전이 이토록 빠르고 거세리라고는 그 어느 과학소설 작가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과학소설이 기가 막힌 예측력을 자랑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과학소설을 읽고 즐기는 데에는 큰 지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번쯤 이런 질문을 던져 봐야 하지 않을까? 즉, 과학소설은 애당초 100퍼센트 ‘예측’을 위한 문학 장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질문을. 과학소설은 미래에 대한 스릴 만점의 ‘예측’ 이외에도 또 다른 뭔가를 독자들에게 안겨주는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을.

‘예언적·계시적 문학’으로서의 과학소설

메리 셸리(Mary Shelley)가 『프랑켄슈타인』을 발표하기 훨씬 이전에도 ‘과학소설적인(sicence-fictional)’ 작품은 오래 전부터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큰 코와 서글픈 짝사랑으로 세간에 알려진(그러나 극중 인물과는 거리가 먼) 프랑스의 군인이자 문필가, 시라노 드 베르쥬락(Cyrano de Bergerac)은 17세기 중반 『Histoire Comique』에서 달과 태양으로의 여행을 꿈꾸었다. 그 이외에도 조나산 스위프트(Jonathan Swift)의 『걸리버 여행기 (1726년)』 등과 같은 셸리 이전의 여러 환상적인 내용을 담은 이야기는 분명히 ‘과학소설적’이기는 하되 여전히 현대적인 의미에서 ‘과학소설’이라고 부르기는 힘든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의 『Don Quixote』를 ‘과학소설적’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몽상에 불과한 이야기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이는 팬이 있다면 그야말로 돈키호테 식 해석이라고 웃어넘길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셸리 이전의 많은 작가들에게 당시로서는 너무나 환상적이기에 현재에는 오히려 ‘과학소설적’으로 보이는 소재들은 대부분 재미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끔씩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환경에 대한 신랄한 ‘풍자(諷刺)’이기도 했다. 풍자는 신랄할수록 좋은 것이고, 그러므로 신랄하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 (캐리커쳐가 실물과 똑 같으면 누가 재미있어 하겠는가?) 풍자를 위한 환상적인 작품은 아무리 ‘과학소설적’인 면이 풍부하더라도 과학소설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산업혁명의 기운이 유럽을 덮으면서, 합리주의 정신이 팽배하면서, 과학과 기술상의 놀라운 발견과 발명이 뒤따르면서, 그저 환상적인 재미를 주던 소재들과 풍자에 불과했던 이야깃거리들은 조금씩 현실적인 무게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의 무자비한 진보와 합리주의 정신에 의거한 날카로운 지성은 미래로 향하는 외삽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러한 외삽을 통해 나타난 인류의 미래는 어둡고 암울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어둡고 암울한 우리의 미래는 과학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옷을 걸친 채 ‘예언자’처럼 등장하게 된다.

그렇다! 과학소설은 등장할 때부터 ‘예언적’이고 ‘계시적’인 색깔을 분명히 했다.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프랑켄슈타인은 원래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임을 잊지 말자)의 모습은 인류가 생명의 비밀을 손안에 넣었을 때 벌어질 사태에 대한 ‘묘사’나 ‘예측’이 아니었다. 웰즈가 서기 802,701년에 목격하는 처참하게 이분화된 인류의 모습은 속되고 역겨운 자본주의 종말에 대한 변형된 ‘막스적 예측’이 아니었다.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에서 전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이 ‘변신’을 거쳐 우주정신과 합일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우리 인류가 겪을 진화의 끝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1953년 『유년기의 끝』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 표지 안쪽에는 ‘이 책에 표현된 의견은 저자의 의견이 아니’라는 경고문이 들어가 있었다.) 즉, 그들이 보여준 미래는 어디까지나 ‘예언(豫言)’이나 ‘계시(啓示)’에 불과한 것이었다.

과학소설의 이러한 전통은 이후로도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심지어 하인라인, 아시모프, 폴 앤더슨(Poul Anderson) 등과 같은 과학소설 작가들조차 방대한 ‘미래역사(a future history)’를 쓰면서, 처음부터 ‘이렇게 인류의 역사는 펼쳐지리라!’하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어줍잖은 자기 합리화는, 즉 과학소설이야말로 지나온 과거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동시에 과학적인 외삽법을 동원하여 추세를 연장함으로써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스타운딩≫의 편집장이었던 존 W. 캠벨 2세(John W. Campbell)가 고안해 낸 지적 허영의 산물이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MIT와 Duke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캠벨은, 자신이 독보적인 편집인으로 과학소설계를 호령하기 이전에 미국의 펄프 잡지 시대를 풍미하던 E. E. 스미스(E. E. Smith)의 『Lensman』이나 『Skylark』시리즈와 같은 수퍼 사이언스를 박살내기 위해서, 과학소설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 했다. 캠벨은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작가들에게 엄밀한 과학적 마인드를 통한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내도록 끊임없이 요구했고, 또 잡지의 사설란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되풀이해서 설파하였다. (물론 자신의 리더십에 잘 따르는 작가들에게는 후한 보너스를 안기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대 과학소설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고 추앙 받으며, 심지어는 과학소설의 ‘황금시대(the Golden Age)’를 이끈 주역으로까지 칭송 받는 캠벨의 이데올로기가 ‘과학소설의 주된 무기는 미래에 대한 적확한 예측’이라는 깨지지 않는 신화로 아직까지 살아 숨쉬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1940-50년대 캠벨의 전성기에 그를 따르던 소수의 작가들 이외에, 과학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미래에 대한 예측이었노라고 믿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캠벨의 지도를 받기는 하였으되, 언제나 독불장군처럼 제 잘난 척하기를 좋아했던 하인라인은 자신이 쓰기 싫은 작품은 아무리 캠벨이 보너스로 꼬셔도 쓰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또한 캠벨 스타일의 과학소설을 쓰지 않았던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는 그래서 당시 가장 후한 원고료를 지불하던 ≪어스타운딩≫에 단 한 번밖에 글을 실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과학소설’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낸 휴고 건즈백(Hugo Gernsbeck)조차 과학소설을 오락과 교육의 절묘한 결합이라고 주장했을 뿐, 단 한 번도 과학소설이 미래의 청사진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과학의 힘이 세계를 바꾸고 인류의 운명을 바꾸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숱한 과학소설 작가들 사이에는, 프레데릭 폴(Frederik Pohl)이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미래에 대한 예측이 더욱 완벽하고 더욱 믿음직스러워질수록, 그 예측은 더욱 쓸모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오히려 팽배해 있었다. 바꾸어 말해서, 과학소설의 진정한 힘은 부분적이고 세부적인 예측의 정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자유롭고 지적인 탐구에 있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현대적 신화’의 창조와 과학소설

그러나 과학소설은 바로 그 , 즉 다양한 미래상에 대한 탐구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신화(神話, myth)’를 창조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탐구는 우리의 시각이 향하는 3차원적인 공간을 4차원적인 시공간(時空間)으로 바꾸게 마련이다. 그리고 바로 그 4차원적인 시공간이란, 미래라는 시간적인 개념이 우주적인 공간과 결합된 산물이다. 미래에 대한 탐구는 궁극적으로 우주의 종말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또한 우주는 물질의 덩어리에 불과하므로 당연히 우주의 종말에 대한 사색은 철저하게 ‘물질론적(materialistic)’인 성격을 띄게 된다.

물질론적인 우주관은 신비로운 존재로써의 우주와 그 안에서 태어난 생명을 무자비한 열역학법칙의 노예로 만든다. 우주는 끝없이 팽창할 뿐이며, 뜨겁게 타오르던 모든 별들도 종국에는 싸늘하게 식게 마련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인류의 진화와 눈부신 문명은 그저 음울하고 서글픈 죽음의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거기에 대한 힘찬 카운터 펀치는 바로 우리 인류의 ‘지성(知性)’에 있다고 과학소설은 말한다. 신비로 가득 찬 우주의 모습과 인류의 미래가 싸늘한 지성에 의해서 법칙화되고 이해될 때, 바로 그 순간 인류의 지성은 열역학 제 2 법칙에 따라 차가운 죽음으로 치닫는 우주와 인류의 미래를 수놓는 불꽃놀이처럼 (일시적이기는 하되) 아름답기 그지없는 성취(成就)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성취감의 도구인 합리성에 의거한 과학적 방법론은 신비주의(神秘主義), 반합리주의(反合理主義),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가득 차 있던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새로운 ‘신화’가 된다.

그러나 과학소설이 발견한 (아니 계발해 낸) 새로운 ‘신화’가 기존의 종교적이고 부족적인 ‘신화’를 대체하면서도 여전히 그 신비로움과 종교적인 황홀경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일견 반과학적이고 반합리주의적인 서술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Last and First Men (1930)』의 서문(序文)에서 올라프 스태이플던(Olaf Stapledon)이 ‘우주적인 배경에서 인류라는 종(種)에 대한 고찰은 바로 일종의 신화를 창조하는 행위’임을 밝히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과학소설 평론가 패트릭 워릭(Patrick Warrick)이 과학소설에서 ‘신화란 우주와 인류의 내적 의미를 논증하는 이야기들의 총합체’라고 주장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과학적 모델 자체가 이제 새로운 의미에서의 ‘신화’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 역시 과학소설을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새로운 신화로 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단지 강조하는 바가 우주 전체에 대한 과학적 모델에서 ‘신화 만들기(mythmaking)’에 몰두하는 작가 및 예술가의 영역으로 옮아갔을 뿐이다. 과학적 방법론과 가치체계를 융 심리학(the Jungian psychology)에 기초한 ‘집단 무의식’과 연관시킴으로써, 르 귄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소설’이야말로 ‘현대적인 신화(a modern mythology)’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제 과학소설의 임무는 더 이상 우주의 운명을 물질론적으로 묘사하는 일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내적 우주(the inner space)’에 대한 탐구가 더 중요한 목표가 된다. 과학소설이 ‘현대적인 신화’가 되었다면, 과학소설을 쓰는 행위는 사전 뜻 그대로 ‘신화 만들기(mythopoetic)’가 된다. 그리고 신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지엽적인 과학적 사실이나 정확성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된다. 더 이상 엄밀한 과학적 사실과 가설에 맞아떨어지지 않더라도, 초광속비행, 인류를 닮은 외계 지성체, 자의식을 획득한 로봇의 고민은 충분히 다룰만한 (아니 아주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할) 소재가 된다. (숱한 과학소설 작가들이 1970년대 이후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종의 초광속 통신수단인 ‘앤서블(Ansible)’의 창시자가 르 귄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기가 막힌 예인가!)

그러나 ‘현대적인 신화’로서의 과학소설은 ‘신화’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1960년대 불어닥친 ‘뉴 웨이브(New Wave)’의 바람은 70년대 본격화된 ‘페미니즘’ 운동과 함께 과학소설을 신들이 숨쉬는 저 높은 판테온에서 흘러나오는 ‘신화’에서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일상세계의 따뜻한 ‘은유(메타포)’로 다시 한 번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은유(메타포)’로써의 과학소설

예언적인 과학소설에서 현대적 신화 제조기로써의 과학소설로 이행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그 다음 단계인 은유로써의 과학소설로 다시 한 번 환골탈태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실 폴랜드 태생의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는 이미 1925년 『Language and Myth』에서 ‘신화와 은유의 근본은 하나’임을 주장했다. 르 귄 역시 자주 신화와 은유를 넘나드는 의미에서 과학소설을 바라보았다.

이는 60년대 이후의 시대적 사상적 조류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뉴 웨이브’ 문학운동은 모더니즘 양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과학소설의 내러티브를 송두리째 흔들려는 시도였다. J. G. 발라드(J.G. Ballard)를 필두로 한 실험적인 내러티브는 형식의 파괴를 통해 내용의 파괴까지도 음모하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박살난 자동차와 다양한 조합의 섹스로 가득찬 『Crash』와 엽기적인 소재를 통해 인류의 미시적인 내우주의 심저에까지 도달하려는 열망인 『The Atrocity Exhibition』등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기존의 양식이 철저하게 깨져나간 빈자리에 남은 것은 몽환적인 이미지와 엽기적인 플롯이었다. 뉴 웨이브에 속한 작가들이 기성 과학소설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종말(終末)을 화두(話頭) 삼아 작품을 여럿 썼으되, 한결같이 그 종말의 이미지가 내우주적인 종말이었음은 좋은 예라고 하겠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더 이상 물질론적인 우주의 종말이 아니었다. 시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우주의 종말을 논하기에 앞서, 그들은 이성애와 동성애가 혼재된 사랑의 종말과 엽기를 통한 도덕의 종말을 먼저 생각했으며, 결국에 가서는 우주가 끝나기 훨씬 전에 존재의 버거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는 인류의 화석(化石)과도 같은 종말을 다루었다. 종말에 대한 이토록 생경하면서도 색다른 접근을 효과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철저하게 이미지와 분위기였고, 이미지와 분위기는 결국 인류의 상태를 드러내는 ‘은유’에 불과하다.

1970년대 본격화된 과학소설계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은 과학소설을 ‘은유’로 보려는 시각에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된다. 중산층 백인 남성의 지적, 정치적, 경제적 배경을 철저하게 유지하던 과학소설은, 표현 양식 면에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뉴 웨이브 운동에 의해서 이미 한 차례 강타를 당한 형편이었고, 조애너 러스(Joanna Russ)나 제임스 팁트리 2세(James Tiptree, Jr.) 등과 같은 페미니스트 작가들의 대거 등장은 세계를 한 가지 색으로 칠하려던 기존의 과학소설계에 일종의 KO 펀치를 날린 셈이나 다름 없었다.

페미니즘은 쉽게 말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억눌린 계층인 여성의 목소리를 사회 전체에 걸쳐 반영시키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기존의 독단적인 세계관을 또 다른 독단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첫째도 ‘다양성의 존중’, 둘째도 ‘다양성의 존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양성의 존중은 상대적 가치관의 존중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 운동이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에만 머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오히려 신화로서의 과학소설에 더 적합한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란 여전히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거시적인 문화 유산에 속하며, 설령 개인이 나름대로의 신화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체계 내에서의 정합성은 언제나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 웨이브와 페미니즘이 제안하는 은유로서의 과학소설은 더욱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냉정한 정합성을 크게 요구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사람은 모순 덩어리 아닌가? 어제 열망했던 사랑이 오늘 식듯이, 오늘 입맛 다시던 진미(珍味)에 내일이면 식상하듯이, 개인의 우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결국 사람은 저마다 무지개가 아닌가?

은유로서의 과학소설은 그러므로 일정한 체계를 완전히 무시한다. 아무리 같은 꿈이라도 어제 꾼 꿈의 의미가 오늘 꾸는 꿈의 의미와 달라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문학이란 사람의 인생에 좌표(座標)를 제시할 수 없으며, 제시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모든 문학은 은유’라는 르 귄의 주장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경험이 무수히 많은 가능성으로 공존하는 과학소설의 머나먼 지평에 대한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과학소설이 일정한 좌표를 제시하지 않는 (그리고 그럴 수도 없는) 은유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과학소설과 그 이외의 문학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아예 “과학” 부분을 뚝 떼어낸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닐까? 현대적인 신화 제조기로써의 과학소설을 한 차원 더 깊숙히 개인적인 소우주로 돌릴 수 있었던 은유로써의 과학소설은, 그러므로 지나친 경우 자칫 과학소설이 다른 문학 장르와 구별될 수 있는 특성을 아예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계시’이자 ‘신화’이자 ‘은유’인 (그리고 가끔씩 점쟁이도 되는) 과학소설>/font>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소설의 역사를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훑어 나가는 가운데, 과학소설이 (또는 과학소설 작가들이) 노리던 바가 예언적인 비전에서 현대적인 신화의 창조로, 그리고 신화에서 다시 은유로 탈바꿈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 와중에 미래에 대한 적확한 예측이야말로 과학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주장은, 과학소설 전문 잡지가 상업적인 전성기를 누리던 1940-50년대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캠벨과 일단의 작가들에 의해서 유포된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물론 거시적인 예언이나 계시가 때때로 세부적인 면에서조차 현실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종종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적이고 계시적인 과학소설의 특성이 자주 정확한 예측과 혼동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더구나 캠벨이 주장했던 외삽에 의거한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과학소설의 특기는 계시적인 진지함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던 미국 펄프 시대의 싸구려 수퍼 사이언스 류의 과학소설에 대한 일종의 반동에서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캠벨이 유포한 아슬아슬한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약간 더 관대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과학소설은 한 번도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겠다는 의도에서 씌어진 적이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는 현대의 과학소설이 위의 세 가지 모두가 뒤섞인 채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계시로 등장하는 과학소설이 연거퍼 유사한 소재를 강도있게 제시하는 경우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신화가 될 수 있으며 (그러나 때로 클리셰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러한 계시와 신화를 해석해내는 독서경험은 철저하게 은유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소설을 바라보는 시각은 늘 이 세 가지 모두를 어우르는 열린 자세를 취해야 하리라. 또한 이 모든 복잡다단한 이론적 논의를 다 던져 버리더라도, 과학소설의 밑바닥에는 읽는 즐거움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매력이 늘 흐르고 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올더스 헉슬리(Aldus Huxley)는 『멋진 신세계』에서 세세한 점들은 점쟁이 뺨치게 예측했으면서도 전체적인 과녁에서 형편없이 비켜갔다고들 평가한다. 조지 오웰(George Owell)은 『1984년』에서 세부사항은 하나도 맞추지 못했으면서도 전체적인 주제 면에서 10점 만점을 주고 싶을 만큼 으스스하게 소름끼치는 빅 브라더의 세상을 예견했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나 『1984년』이 역사에 길이 남을 과학소설 걸작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진정으로 훌륭한 작가는 과학소설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꿈과 소망과 사랑과 야망을 은유로 표현하며, 그 은유가 시대와 사회를 뒤흔들어 한 때의 신화가 되고, 다시금 시대를 뛰어 넘어 예언과 계시로 살아 남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런 와중에 우리의 개인적인 은유와 현대적인 신화와 미래에 관한 계시가 가끔씩 출렁이는 물침대나 편리한 리모콘 얘기를 곁다리로 늘어놓았음을 아는 것도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아니겠는가!

이매진 칼럼 –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 (5)

 

(2001년 06월 04일)

이매진 칼럼 (6) – 하드SF는 씹기가 딱딱해: 하드SF의 허허실실

웰즈의 작품들은 전혀 과학적이지가 못하다. 내 작품과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물리학적 사실을 근거로 작품을 쓰는 데 비해서, 웰즈는 아예 없는 얘기를 지어낸다.

― 쥘 베르느

‘워프 항법’이나 ‘물체 전송기’, 또는 ‘광선총’ 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써먹는 것은 문제가 있다. 화성에 숨쉴 수 있는 대기가 있고 기후도 알맞다는 식으로 묘사하거나, 탄도학이나 천문학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는 사람이라면 과학소설을 아예 쓰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사람들이 쓰는 소설은 과학소설이 아니다. 오락거리 정도야 되겠지만, 어찌 진지한 사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말하는 바가 뭔지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야말로 과학소설 작가가 독자들에게 지켜야 할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일반 독자들이 작가의 거짓말을 간파해내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짓은 ‘사기행위’나 마찬가지이다.

― 로버트 A. 하인라인

하드 SF란 무엇인가?

하드 SF란 무엇인가? SF가 무엇인지 제대로 콕 집어내기도 벅찬 마당에 이제는 돋보기를 들이대고 SF 중 일부 작품들의 특성을 얘기해야 한다니 답답할 뿐이다. 과감하고 쉽게 표현하자면, 하드 SF란 물리학, 천문학, 화학, 생물학 등의 ‘하드 사이언스’에서 나온 과학적으로 이미 확립된 이론이나 현재까지 거짓임이 판명되지 않은 가설을 바탕으로 한 과학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하드 SF를 구별하는 잣대로, 소설에서 과학적 사실에 바탕을 둔 작가의 추론이나 가설을 빼면, 소설이 그만 소설이 아니게 되는 경우를 들기도 한다.

하드 SF가 있으면 당연히 소프트 SF라는 것도 있어야 하련만,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소프트 SF라는 말은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사실 ‘하드 SF’라는 용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평론가들도 매우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F 독자들 사이에서는 ‘하드 사이언스’에 대비되는 언어학, 심리학,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 경제학 등의 과학적 내용을 근간으로 삼는 SF를 광범위하게 ‘소프트 SF’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번 기사에서는 SF 중에서도 ‘하드코어(Hardcore)’에 속한다는 하드 SF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특히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하드 SF는 특별히 쓰거나 읽기에 어려운 SF의 하위 장르가 아니라는 점, 하드 SF가 다른 하위 장르에 비해서 유달리 침체를 겪고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나아가서는 ‘하드’라는 수식어 뒤에는 과학적 엄밀함을 넘어선 뭔가 수상한 냄새가 풍긴다는 점을 얘기하기로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하드’냐 ‘소프트’냐를 떠나서 SF라는 장르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의 폭을 조금 더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하드 SF는 쓰기가 어렵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드 SF’가 물리학 등의 하드 사이언스에 기반을 둔 SF라고 한다면, ‘하드 SF’를 쓰려면 당연히 하드 사이언스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하리라. 바로 이런 특성 , 많은 사람들은 하드 SF를 쓰는 일이 일반 문학작품은 물론이거니와 소프트 SF를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믿어왔다.

줄 베르느는 자신의 작품이 엄밀한 과학적 논증을 거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느꼈고, 바로 이 점을 무기로 허버트 웰즈의 과학적 로맨스(Scientific Romance)가 엉터리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그는 강력한 대포를 통해 달에 도착할 수 있다거나 텅 빈 지구 속에는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난 뒤, SF의 거장 로버트 A. 하인라인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드 SF를 쓰는 짓은 독자에 대한 기만이라고까지 몰아붙였으니, 전통적인 글쓰기 솜씨 이외에 과학적인 지식까지 작가에게 요구하는 하드 SF가 쓰기 어렵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것도 무리가 아니다.

화려한 스페이스 오페라 스타일의 하드 SF로 1980년대 SF계를 석권했던, 『떠오르는 행성(Startide Rising)』으로 국내에도 이미 소개된 바 있는, 데이빗 브린(David Brin)은 하드 SF 작가들이 독자들의 심판대에 서기 이전에 이미 동료 하드 SF 작가들의 엄정한 눈길에 노출되기 마련임을 고백한 바 있다. 동료 작가들 사이에서의 보이지 않는 압력과 경쟁 의식은 그레고리 벤포드(Gregory Benford)나 로버트 포워드(Robert L.Forward), 그렉 베어(Greg Bear) 등의 몇몇 탁월한 하드 SF 작가들 이외의 사람들을 하드 SF계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게 하는 요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 대한 엄격한 기준은 사실 상당히 과대포장된 인상이 짙다. SF에서 사용되는 아이디어들의 대부분이 쏟아져 나왔다는 1950년대 이전의 SF 매거진의 황금기를 살펴보면, 당시 활발한 작품 활동을 보이던 작가들 대부분이 엄밀한 과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음은 물론이거니와, 별로 엄밀하지도 않은 ‘엉터리’ 과학지식을 신선하게 포장하여 그럴 듯하게 내놓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사실 하드 SF에 대한 독자들의 일반적인 인상은 존 캠벨 2세(John W. Campbell, Jr.)가 SF 잡지 「어스타운딩(Astounding)」의 편집장이 된 이후에 굳어졌다고 보는 편이 옳다. 캠벨 시대 이전의 펄프류 SF에서는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Edgar Rice Burroughs), 레이 커밍스(Ray Cummings), E.E. 스미스(E.E.Smith) 등의 말도 안 되는 ‘우주판 모험 활극’ 또는 은하계 한두 개쯤 광선 무기 하나로 없애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던 ‘수퍼 사이언스’류의 작품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캠벨 역시 ‘수퍼 사이언스’류의 작품을 쓰던 펄프 작가 출신이었고, 나중에 편집장이 된 이후 ‘수퍼 사이언스’류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스미스의 『렌즈맨(Lensman)』시리즈를 잡지에 연재하는 등, 과학적으로 엄밀하지 못한 모험담 중심의 SF에 너그러운 태도를 보인 적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반 보그트(A. E. van Vogt)나 론 허바드(L. Ron Hubbard) 등의 작가들을 이후에도 꾸준히 가까이 했다(결국 허바드라는 펄프 작가가 돈을 벌 목적으로 창시한 다이어네틱스(Dianetics)라는 사이비 과학에 심취하면서, 캠벨은 점점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이아네틱스는 후일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로 발전한다).

그러나 캠벨이 ‘수퍼 사이언스’ 중심의 SF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과학적 사실에 기초하여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는 하드 SF의 기본적인 모델에 치중했던 것은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당시 캠벨이 누렸던 편집장으로서의 독점적 영향력이 SF계 전체에 미치면서, 그가 믿고 있던 ‘무릇 SF는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유포되었던 것이 일반 SF팬들의 ‘하드 SF’에 대한 인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드 SF를 쓰기 위해서는 과학(특히 하드 사이언스류의) 교육을 제대로 받거나 과학에 대한 이해가 엄밀해야 한다는 주장은 베르느에서부터 캠벨을 거쳐 하인라인에 이르기까지 이어온 SF계의 한 줄기 주장에 불과하다. 앤소니 부처(Anthony Boucher) 등의 새로운 시각을 지닌 편집자들과 「Magazine of Fantasy and Science Fiction」 등의 새로운 잡지들이 SF계에 등장하면서, 그리고 1950년대 이후 값싼 문고판 단행본 시장이 크게 성장하면서 잡지가 아니라 단행본으로 작품을 발표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캠벨의 영향력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후 SF계는 폴 앤더슨(Paul Anderson)과 같은 걸출한 하드 SF 작가가 채드 올리버(Chad Oliver)나 에드가 팽본(Edgar Pangborn) 등의 소프트 SF 작가들과 잘 어울리는 형국으로 돌아서기 시작했고, 1960년대 뉴 웨이브(New Wave) 운동을 거치면서 소프트한 과학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자연스럽게 SF계에 자리잡게 되었다.

하드 SF는 죽어가는가?

그렇다면 왜 많은 이들이 요즘에는 예전처럼 멋진 하드 SF를 자주 맛보지 못한다고들 한탄하는 것일까? 정말 하드 SF는 죽어가는 것일까? 소프트 SF의 진흥에 밀려나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 대한 응답은 역시 하드 SF적인 대답이 적격이리라. 하드 SF가 과학적 사실 및 반증되지 않은 가설을 바탕으로 작가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통해 색다른 예측을 소설로 형상화시킨 것이라면, 하드 SF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신선한 아이디어야말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데이빗 브린은 바로 이 신선한 아이디어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는다. 우리가 사는 물리적인 우주 공간 자체가 유한한데, 어찌 아이디어가 존재하는 관념상의 공간만은 무한하다고 믿을 수 있는가? 몇몇 과학철학자들은 20세기말 현재 물리학의 지평이 8할 이상 이미 채워진 상태라고 주장했다.

신참내기 대학원생들이 점점 학위 논문을 쓰기가 어려워지는 이유가 인구 증가와 구조조정으로 세상 살기가 점점 힘들어져가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히트중이라는 유행가가 어디선가 제법 들어본 듯한 선율인 경우가 자꾸 느는 것이, 내가 점차 대중음악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은 아니리라. 패러디가 예술의 분출구로 엄연히 자리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새롭고 놀라운 창작물을 찾기보다 기존의 작품을 재탕 삼탕 우려먹고 또 이를 비틀어 재미를 찾는 일이 꼭 패러디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님을 우리는 자주 느낀다.

데이빗 브린의 과감한 답변이 있고 불과 수개월 뒤 스파이더 로빈슨(Spider Robinson)은 바로 브린의 해석을 고스란히 옮긴 “우울한 코끼리(Melancholy Elephants)”라는 단편으로 휴고 상을 타기까지 했으니,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얻기가 어렵고 또 경쟁이 치열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브린과 로빈슨의 이야기가 주는 의미심장한 교훈을 떠나서, 인간의 창조성이 무디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말 그대로 ‘증명’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80년대를 수놓은 벤포드나 포워드 등의 작가들이 여전히 건재한 가운데, 90년대 이후 베어나 그렉 이건(Greg Egan), 폴 매컬리(Paul McAuley) 등을 거쳐, 21세기 들어서도 린다 나가타(Linda Nagata), 스티븐 박스터(Stephen Baxter), 알래스테어 레이놀즈(Alastair Reynolds) 등의 쟁쟁한 신진 하드 SF 작가들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면, 브린의 진단은 오히려 섣부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드 SF는 읽기 어렵다던데……

쓰는 데에도 엄청난 자료 조사와 난해한 과학 지식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니,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만큼은 아닐지라도 상당 부분 과학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물론 맞는 말이다. 과학적인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도 SF를 읽고 즐길 수 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한가일 것이다.

여기에서 본 칼럼의 첫 기사였던 「SF는 언제나 열두 살?」을 떠올려보는 것이 좋으리라. SF에 푹 빠져든 (미국의) 골수 SF 팬들은 평균적으로 열두 살 무렵 처음 SF를 접한다고 한다. 최근 「이매진」을 장식했던 「장르문학 입문기 : SF편」에서 드러난 우리 나라 팬들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서양의 열두 살이라면 우리 식으로 넉넉잡고 계산해도 열네 살을 절대로 넘지 않는다. 초등학교 6년차부터 중학교 2년차 나이에 불과하다. 또 그 나이에 접하는 SF가 모두 소프트 SF인 것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약간 덜 복잡하기는 하지만) 웬만한 하드 SF 작품들을 성인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읽어내리는데 청소년 독자들은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쓰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하드 SF는 읽기도 만만치 않을 터인데, 어떻게 초등학교 상급생이나 중학생 나이의 청소년들이 SF에 빠져들게 되는 것일까? SF라는 장르가 다른 장르와는 달리 청소년용 작품들이 유독 많아서는 아닐까? 하지만 대답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청소년용 SF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규모란 미국의 경우에도 보잘 것이 없다. 오히려 『Goosebumps』시리즈와 같은 애매모호한 공포물이나 『해리 포터』시리즈가 더욱 맹렬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 분야에서 성적이 좋고 또 관심이 높은 청소년이 SF에 더욱 쉽게 빠져든다고 말할 수는 있을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NASA의 과학자들이나 마이크로 소프트에 근무하는 공학자들 중에 SF의 열성적인 팬들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불과 열두 살이었을 때 어느 한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고 해서, 그 분야로 줄곧 나아가 전문가가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열두 살 때 천체물리학자, 컴퓨터 공학 박사, 프로그래머, 천문학자가 되겠다고 꿈꾸었던 이들이 그 꿈을 고스란히 이루는 경우는, 장군이나 교사가 되겠다는 꿈이 현실화되는 경우보다 결코 흔하지도 드물지도 않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도대체 열두 살 짜리가 배우고 아는 과학 분야의 수준이라는 것이 어렵고 복잡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편미분과 적분, 벡터와 행렬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열두 살 짜리가 이해하는 정도의 과학 지식은 그 이후 TV나 잡지, 뉴스 등을 통해서 얻는 과학 상식 정도에 비하면 아주 미천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몇몇 단편적인 과학 지식만으로 과학적인 마인드가 형성되는 것은 더욱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정보를 취합하는 능력, 이를 토대로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 잘못이 생겼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는 임기응변의 능력 등이야말로 보다 폭넓고 속깊은 과학적 마인드의 기초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열두 살 짜리도 즐기는 하드 SF를 읽기에 어렵다고 단정하는 것은 편견에 불과한 생각인 듯하다.

‘하드’하다는 말을 다시 살펴보면

앞서 지적한 것처럼, 쓰기 어렵다고 해도 넘을 수 없는 태산(泰山)처럼 어려운 것이 아니고, 읽기 어렵다고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만큼 난해한 것도 아닌 ‘하드 SF’에서, 작가와 독자와 평론가 모두가 ‘하드’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다른 하위 장르의 SF와 대접을 달리해온 것일까? 거기에는 뭔가 ‘하드’하지 않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작품들이 역사적으로 하드 SF의 반열에 올라있는지를 검토해보는 것이 좋으리라. 숱하게 많은 작품들 중에서 몇 가지만 꼽는 것이 무리이기는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웬만한 SF 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들만 몇 가지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우선 쉽게 접할 수 있는(즉, 국내에 번역 소개된 바 있는) 단편으로는 탐 고드윈(Tom Godwin)의 「차가운 방정식(The Cold Equations)」이나 래리 니븐(Larry Niven)의 「변하는 달(Inconstant Moon)」, 그리고 장편으로는 아서 클라크(Arthur C.Clarke)의 『라마와의 랑데부』, 앤더슨의 『타우 제로(Tau Zero)』, 베어의 『블러드 뮤직(Blood Music)』, 그리고 벤포드의 『타임스케이프(Timescape)』 등을 들 수 있으리라.

이들 모두를 이 자리에서 꼼꼼히 분석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므로, 박상준님이 1994년 엮은 『환상특급』이라는 걸작 단편집에 실린 바 있는 「차가운 방정식」을 예로 들어 살펴보기로 한다(앤더슨의 『타우 제로(Tau Zero)』에 대해서는 최근 「이매진」에 실린 손준호님의 리뷰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 작품은 1954년 캠벨의 「어스타운딩」에 실려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후일(1970년) 로버트 실버버그(Robert Silverberg)가 편집한 『SF 명예의 전당(The Science Fiction Hall of Fame)』 제 1권에 당당히 수록될 정도로, SF계에서는 클래식으로 평가받고 있는 수작이다.

「차가운 방정식」에서는 비상사태로 수백 명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우주 개척지로 구급품을 싣고 향하는 화물 우주선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화물 우주선에는 우주선 조종사 한 명이 구급품을 가득 싣고 우주 개척지를 왕복하는데 드는 연료만이 정확하게 실려있다. 더도 덜도 가져가지 못하고 가져오지 못한다. 그러므로 「방정식」이란 바로 우주 화물선의 총 질량과 연료량 사이의 탄도학을 결정짓는 수학적 관계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화물선에 그만 밀항자가 있다는 사실이 출항 뒤 드러난다. 밀항자는 우주 개척지에서 일하는 오빠를 만나고 싶은 일념에 몰래 숨어든 철모르는 십대 소녀 마릴린(Marilyn)이다.

이제 조종사는 커다란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다. 순진무구한 소녀를 살리자니 개척지에서 죽음에 직면한 수백의 개척민들이 문제가 된다. 작가는(그리고 작품 속의 조종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마릴린의 얼마 안 되는 체중까지 짊어지고서는 화물선이 도저히 개척지 행성에 무사히 착륙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아무 죄도 없는 마릴린을 진공의 우주 공간으로 방출하는 길뿐이다. 피도 눈물도 모르는 수학 방정식은 그러므로 ‘차가운’ 방정식이 된다. 아무런 증오도 악의도 없지만, 어쩔 수 없는 물리법칙에 의해서 한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차가운’ 방정식인 셈이다.

작품 속에서 우주 공간과 이를 지배하는 물리학 법칙은 어디까지나 ‘중립적(Neutral)’일 뿐이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단지 ‘우선 순위(Triage)’에 있을 뿐이다. 수백의 개척민 대 단 한 명의 목숨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작가는 놀라운 솜씨로 어쩔 수 없이 수백의 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고뇌를 묘사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선한 의도 따위로는 통제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자연 법칙이 갖는 냉정한 과학적 함축성을 성공적으로 풀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작품의 논제(Thesis)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이 작품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그 무소불위의 자연 법칙이 어떠한 목적에서 어떻게 인용되는가는 충분히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독자는 작품의 결말에 이르기 직전까지,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가슴을 졸이게 된다. 뭔가 천재적인 해결책이 ‘짠!’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그래서 불쌍한 마릴린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결말은 우리가 너무나 자주 목도한 ‘해피엔딩’이기에, 오히려 독자들은 ‘아니야, 그렇다면 너무 맥빠져!’ 하며 비극적인 결말을 기대하면서 (하지만 여전히 마릴린을 가여워하면서) 작품을 읽어내려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반된 희망과 기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작가가 작품의 설득력(Plausibility)을 배반하지 않은 채 (그러나 한 치의 긴장감도 잃지 않으면서) 성공적으로(?) 마릴린을 우주선 밖으로 밀어 내버릴 때, 마침내 “역시 작가는 공정했어!”라는 감탄사로 끝을 맺게 된다. 하인라인이 주장했던 것처럼, 작가는 물리법칙을 아전인수격으로 바꾸면서 독자를 우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기’를 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작품 자체는 과학적으로 공정하게(Fair), 사기를 치지 않고 끝을 맺었지만, 우리는 그러한 ‘공정함’이 무슨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작품 속에서 작가는 이렇게 한탄한다.

왜 그 애는 뭔가 뱃속 검은 생각을 감춘 사내가 아니었을까? 어딘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법을 피해 도망다니는 범법자이거나, 개척지에 몰래 들어가 뭔가 돈이 될 만한 것을 훔쳐낼 요량인 기회주의자이거나…….

조종사라면 한평생 한 번쯤 이런 식의 밀항자를 발견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리라. 뒤틀린 사내, 비열하고 이기적인 사내, 잔인하고 위험한 사내를. 그러나 오빠를 보기 위해서는 벌금도 달게 내겠다는 미소띤 얼굴에 푸른 눈을 한 소녀라니…….

게다가 마릴린의 태도 역시 작가(또는 조종사, 또는 독자)의 애석한 비애를 덜기에는 너무나 천진무구할 뿐이다.

“잘못했어요. 그런데 이제 전 어떻게 되는 건가요? 벌금을 내면 되는 거죠? 그렇죠?”

여성에 대한 이렇게 철저하게 이중적인 잣대는 그러므로 작가가 독자의 비탄을 자아내기 위해 파놓은 수사학적인 함정에 불과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작가는 작품 내내 수십 킬로그램에 불과한 마릴린을 개척지에 도착시킬 방도가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도무지 계산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칼같이 정확하게 맞춰서 채운 연료에, 정확한 궤도를 따라 정해진 시각에 도착하도록 맞춰진 우주선은 어찌나 정확하고, 완벽하고, 오류에서 자유로운지, 예비 연료 탱크도, 백업 시스템도 구비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조종사는 마릴린의 오빠에게 라디오를 통해 소식을 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뭔가 기기상의 문제가 생겼는지” 라디오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무슨 어불성설이란 말인가? 게다가 우주선 내부의 모습을 묘사했던 대목을 다시 살펴보면, 마릴린 대신에 의자 등의 불필요해 보이기만 하는 물건들을 대신 밖으로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인지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해진다. 그럼에도 우리의 조종사는 이렇게 괴로운 어조로 고백한다.

“미안하구나. 내가 얼마나 미안한지 넌 모를 거야. 어쩔 수가 없어. 우주의 그 누구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니까.”

“아무도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걸 원하지 않아. 사람의 힘으로 뭔가 바꿀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누구도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야.”

정말 그럴까? 정말 아무도 그런 식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까? 왜? 무엇 ? 누구를 위해서? 행여나 쥘 베르느가 자랑스러워했던, 불변의 ‘과학적 진리’를 왜곡하지 않는 작가적 양심 ? 독자를 속이지 않는 하인라인 식의 작가적 자존심을 위해서? 하드 SF 독자들이 요구하는 ‘공정한’ 게임의 법칙을 위해서?

작가는 우주선의 궤도와 질량 사이의 불변의 물리법칙을 소재로 삼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냉정한 섭리(攝理)를 소설 속에 담았다. 바로 그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법칙을 빼고 나면, 이 작품은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이 작품은 분명 ‘하드 SF’이다.

분명 ‘하드 SF’는 ‘하드’한 법칙 얘기를 하면서도 감동적일 수 있다. 그러나 작가 탐 고드윈이 ‘하드’한 물리법칙이 처절하게 개인의 선택 문제로 화하면서 고뇌의 문제로 다가서게 하는 데 사용한 함정은 어디에서 왔는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 비련의 주인공이 순진함까지 갖추도록 만든 수사법. 조종사의 고뇌를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도록 하는 독백.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골고루 반복해서 찔러넣는 교활함.

‘하드’와 ‘과학’에 휩싸인 미망(迷妄)

SF에는 이미 ‘과학(Science)’이라는 대목이 한 차례 수식어로 달려있다. 거기에 하드 SF라는 용어는 ‘하드(Hard)’라는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하드 SF라는 용어와 마주칠 때 우리는 엄밀함, 과학적인 튼실함, 논리적인 치밀함 등의 인상을 갖게 된다. 하드 SF는 말 그대로 소설이라는 동네에서 실제 과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과학적 언어(Scientific Language)를 과학 분야의 규칙에 따라 사용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소설이 달성할 수 없는 뭔가를 달성하려고 애쓰는 SF의 하위 장르이다. 그 무엇인가란 바로 현대적인 신화가 된 과학의 ‘권위(Authority)’이다. 과학이 지닌 권위에 소설이 주는 감동을 뒤섞음으로써 하드 SF는 그 어떤 문학 장르도 (더불어 그 어떤 SF의 하위 장르도) 선사할 수 없는 독특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문제는 하드 SF의 매력을 논하는 일이 그저 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드 SF의 과학적 진실과 논리적 엄밀함에 대한 권위주의적인 찬양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과학 법칙에서 드러나는 권위에까지 손길을 뻗치는 일이다. 바로 그럴 때에, 하드 SF는 다른 작가의 과학적 엄밀함에 대해서 비난하는 우를 범하게 되고, 다른 하위 장르의 작품이 독자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손가락질하게 된다. 바로 그럴 때에, ‘하드’라는 수식어는 SF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돕기 위한 분류에 쓰이는 용어가 아니라, 게토화하는 SF세계의 벽을 내부로부터 더욱 높이려는 헛된 시도가 된다. ‘하드’를 ‘과학적 권위’와 혼동할 때 우리는 어느새 미망(迷妄)에 휩싸이는 것이다.

맺으면서

이번 기사에서 우리는 하드 SF는 무엇이며, SF의 다른 하위 장르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팬들 사이에 회자(膾炙)되는 “하드 SF는 쓰거나 읽기에 힘들다”는 믿음의 신빙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드’라는 수식어가 SF에 붙을 때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등장하는 과학의 권위에 기대려는 문학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검토해보았다.

SF는 과학 기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문학 장르이다. 그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작품을 읽고 즐기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논리와 감성이 한데 어울려 제 3의 초월적인 감동으로 떠오르는 것 자체가 어쩌면 SF의 가장 강력한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과학적 사실의 세계를 치밀한 논리의 다리로 감성의 천국에까지 이음으로써 우리 독자들에게 색다른 감동을 선사하는데 남다른 재주를 보이는 이들의 최첨단에 하드 SF 작가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의 세계와 감성의 나라 사이를 잇는 다리는 논리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언어는 무지개와 같아서 보는 이의 시선과 위치에 따라 형형색색의 두께와 찬란함에 변화가 있다. 그 변화무쌍한 언어의 바다를 마음껏 주무르는 능력은 과학의 권위와는 무관한 것이다. 하드 SF의 진정한 힘은 과학적 진리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추론 이외에도 작가의 심오한 통찰력과 이를 형상화하는 재주에 크게 힘입게 된다. 그러므로 하드 SF의 매력과 장점을 그 셋 중 어느 한 가지에 귀속시키려는 행위는 늘 헛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매진 칼럼 –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 (6)

 

(2001년 08월 01일)

이매진 칼럼 (7) – 짧고 굵게 삽시다: 단편으로 거듭나는 과학소설의 세계

왜 단편인가?

문학 동네에서 단편이 하는 역할은 자명하다. 즉, 단편은 작가가 자신의 역량을 실험하고 연마하는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장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기법과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편을 쓰면서 작가는 역량을 키워나간다.

단편은 특히 SF계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해왔다. 앞서 언급한 작가 중심의 이점 이외에도, 특히 단편이 SF에서 각광을 받아온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실험과 연마의 도구인 단편의 특성이 ‘아이디어’와 ‘사고 실험’이 특히 강하게 요구되는 SF의 특성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로버트 하인라인(Robert Heinlein), 아서 C. 클라크(Arthur C.Clarke) 등은 장편으로 성공하기 훨씬 전부터 엄청난 근성과 노력으로 단편을 써댔다. 그들이 터를 닦은 SF계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토마스 디쉬(Thomas Disch)나 J.G. 발라드(J.G.Ballard) 등의 뉴 웨이브 작가들에 의해서 한 차원 높은 문학적 향취를 획득하게 되며, 70년대 이후에는 어슐러 K. 르 귄(Ursula K.Le Guin), 제임스 팁트리 2세(James Tiptree,Jr.), 조애너 러스(Joanna Russ) 등의 페미니스트 작가들에 의해서 사회적인 의식까지 갖추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80년대 들어서는 사이버 펑크 주자들이 새로운 실험 정신으로 단편을 통해 변혁의 주체가 되었다. 브루스 스털링의 「Shaper/Mechanist」 연작물이나 윌리엄 깁슨의 「Burning Chrome」 또는 「Johnny Mnemonic」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은, 단편에서 거듭되는 실험과 도전의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주었다. 창작 SF라고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우리 나라에서도, 아마추어 작가들의 단편 작품들은 꾸준히 통신상에 오르고 있으며, 이영수, 김호진 등의 몇 안 되는 프로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모두 단편을 통해서이다.

단편이 SF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의 두 번째 요인은 경제적인 면에 있다. 말 그대로 펄프의 귀퉁이에서 살림을 차린 SF는 초기의 궁핍하던 시절을 펄프 덕에 먹고 살 수 있었다. 즉, 부지런히 단편을 쓰고 또 써대야 했던 당시의 생존경쟁 덕이었던 것이다.

펄프로 시작한 SF

SF가 SF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을 활보하기 훨씬 이전에도 SF적인 내용을 지닌 작품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SF 작가들은 SF를 쓰기 이전에도 SF라고 할 수 있는 종류의 글을 써서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SF가 SF라는 깃발 아래 모여든 것은 휴고 건즈백(Hugo Gernsback) 이후이다. 펄프 잡지들의 전성기가 한물 지난 1926년에서야 펄프 잡지의 대열에 뒤늦게 합류하면서, SF는 드디어 판타지나 공포소설, 탐정물 등의 다른 펄프 픽션과는 다른 내용과 스타일과 진열대를 동시에 확보하면서 장르문학이라는 세계에 얼굴을 내밀게 된다.

물론 작가의 주수입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장편에서 온다. 문제는 (미국에서) 장편소설을 단행본으로 찍어내서 상당한 수입을 올릴 수 있을 만큼 대규모로 배급할 수 있는 시스템은 20세기에 들어서서, 특히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다는 점이다. 그 이전에는 장르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장편소설을 단행본으로 낸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고, 특히 이를 제대로 전국적으로 배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비싼 책값을 감당할 만한 소득 계층도 많지 않았으며, 돈이 있다고 해서 꼭 책을 읽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락거리는 너무나 드물었다. 영화는 여전히 걸음마 단계였고, TV는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였으니까……. 여행? 전국적인 도로망이 제대로 갖춰진 것은 1940년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그러니 20세기 들어 전세계의 이민이 북적대기 시작한 미국에서, 이해하기 쉬운 (영어로 된) 읽을거리를, 싸게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펄프 잡지들이 대성공을 거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잡지들을 기웃거리며 돈벌 궁리를 하던 건즈백은 일종의 틈새 시장을 발견했고, 거기에 SF(Scientific Fiction)라는 그럴 듯하게 애매모호한 이름을 붙인 뒤, 비슷한 취향을 지닌 독자를 끌어모았다. 이렇게 펄프로 시작한 SF는 그러므로 다른 펄프 시대 장르문학들의 특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짧은 분량 안에, 비슷비슷한 모험담을 호화찬란하게 포장해서, 해피 엔딩으로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는 식의 단편들이 차고 넘쳤던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그러나 SF는 이후 다양한 잡지를 통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배후에는 훌륭한 편집자들의 영향력이 살아 숨쉬고 있다.

잡지 편집자들의 영향력

새로 장사를 시작한 SF라는 상점은 여전히 다른 상점들보다 소규모였고, 대개는 지배인이자 종업원 격인 편집자 한 명이 북치고 장구치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신문 배급망을 이용해 수십 개의 펄프 잡지들을 한꺼번에 운영하던 대규모 출판사들이 하나 둘 펄프계에서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SF 잡지의 독립성은 더욱 올라갔다. 아니, 잡지의 수가 줄어들기는 커녕, 하나 둘 더 생겨나기 시작했다. 「Amazing」이나 「Astounding」 이외에도, 「Magazine of Fantasy and Science Fiction」이나 「Galaxy」 등, 시간이 흐르면서 잡지들이 꾸준히 나타났다. SF라는 작은 동네에서도 조금씩 다른 취향과 특색을 강조하는 잡지들이 명멸했다. 즉, 잡지마다 편집자의 개인적인 취향과 SF관이 더욱 강하게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호레이스 골드(Horace Gold)나 앤소니 부처(Anthony Boucher)는 물론이거니와 불세출의 편집자 존 캠벨(John W.Campbell,Jr.), 프레데릭 폴(Frederik Pohl), 스탠리 슈미트(Stanley Schmidt), 가드너 도조와(Gardner Dozois), 에드워드 퍼만(Edward Ferman), 고든 밴 겔더(Gordon Van Gelder) 등의 편집자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이 좋아하는 종류의 단편들을 잡지에 실으면서, 이를 읽는 독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들의 성향이나 취향까지 보이지 않게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여러 잡지들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목소리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한창 물오른 기존 작가들이 필명을 적게는 서너 개, 많게는 십여 개에 이를 만큼 사용하면서 작품을 대량생산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독자들의 요구에 발맞춰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신인들을 끊임없이 등용하도록 했다. 문학성에 집착하는 고급 문예 잡지들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비집고 들어가듯 신인들에게 인색한데 비해서(게다가 원고료는 아예 없는 경우가 흔하다), SF계는 여전히 새로운 목소리에 대해 관대한 것도 다 이런 전통 때문이다. 문체나 능숙한 이야기 전개에서 약간 처지더라도 ‘아이디어의 문학’이라는 개념에 익숙한 독자들은 진정으로 특출한 목소리에 보다 용감하게 귀기울여 주기 때문이다.

문고판 출판시장의 도래와 걸작선의 융성

잡지에 실렸던 작품들은 그 자체로써는 작가에게 큰 돈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출판계에서는 단행본 시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일단 페이퍼 백(문고판)이 시장에서 큰 호응을 받기 시작한다. SF 출판계 역시 이를 간파하고 대책을 내놓는다. 우선 펄프 시대부터 축적된 단편들을 늘려서 장편화하기 시작했다. 연관된 단편들을 짜깁기 식으로 장편화하는 기법인 ‘픽스-업(Fix-up)’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도 SF계에서이다. 이제 단편으로 먹고 살던 중견 작가들은 목돈을 만질 수 있는 장편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그 덕에 여전히 왕성한 구독층을 보유하고 있던 잡지들은 새로운 작가들을 더욱 다급하게 필요로 했다.

판매대에서 길어야 한 달이면 사라지던 SF 잡지보다 몇 배는 더 오래 가는 문고판 단행본 덕에 새로운 실험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 해에 나왔던 단편들 중에서 최고 걸작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꼭 잡지를 구독하지 않아도, 괜찮은 단편들을 골고루 맛볼 수 있는 새로운 장이 열린 셈이다. 당연히 올해의 베스트를 뽑아 상도 주게 되었다. 휴고 상이 1950년대 초에, 네뷸러 상이 1960년대 중반에 각각 제정된 것도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던 덕이다.

뿐만 아니라, 단행본과 잡지의 특성을 동시에 노리는 ‘단편 걸작선(Anthology)’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립적인 걸작선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로, 일단 나왔던 작품을 다시 모아 싣는 ‘재수록(Reprint)’ 걸작선이다. 『The Year’s Best SF』와 같은 ‘올해의 베스트’나, 『Vanishing Acts』와 같은 ‘멸종’이나 『Roads Not Taken』처럼 ‘대체역사’를 다룬 특정 ‘주제별’ 걸작선이 여기 속한다. 때로는 『The Best from Fantasy and Science Fiction』이나 『Best of Crank』처럼 특정 잡지에 실렸던 작품들을 기념하여 책으로 내기도 한다. 『Nebula Showcase』나 『New Hugo Winners』처럼 여러 가지 SF 상들을 탄 작품들을 나중에 따로 모아 내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런 주제 없이, 예전에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았던 새로운 단편들을 모아 내기 시작했다. 호응이 좋으면 매년 발간하는 시리즈로 격상되기도 했다. 루 애로니카(Lou Aronica) 등이 매년 편집하던 『Full Spectrum』 시리즈나, 최근에 패트릭 닐센 헤이든(Patrick Nielsen Hayden)이 새로 시작한 『Starlight』시리즈가 좋은 예이다.

영국과 미국 위주에서 점차 세계 각국의 SF로 판도가 넓어지고 있는 최근 추세를 반영하듯이, 캐나다 SF를 모은 『Northern Suns』나 호주의 SF를 모은 『Dreaming Down Under』와 같은 국가별 걸작선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재수록하는 걸작선들은 장르에 처음 발을 디딛는 독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과거 걸작들을 다시 찾아 읽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수집 대상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The Road to Science Fiction』시리즈, 『The Good Old Stuff』, 『Science Fiction Century』등은 100년이 채 못 되는 현대 SF를 이해하는 데 최고의 길잡이라고 하겠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형태의 단편 발표장은 SF가 새로운 아이디어와 스타일로 중무장한 채 지금껏 탐구하지 않았던 또 다른 세계로 끝없이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매체가 되어왔다. 잡지가 주도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지만, 여전히 도조와나 데이빗 하트웰(David G.Hartwell), 겔더, 헤이든 등의 훌륭한 편집자들은 잡지가 아닌 형태의 출판물을 이용해서 매년 수백 편에 달하는 단편들을 꾸준히 팬들에게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드커버의 출현과 인터넷 출판환경

1980년대 이후, SF 시장은 또 다시 변모하는 미국 출판시장의 행보에 발맞춰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첫 번째 특징은 하드커버의 강세이다. 잡지보다 훨씬 더 긴 수명을 자랑하지만 여전히 수 개월을 넘지 못했던 문고판 시장은, 급상승하는 인쇄비와 배급망 유지비 등으로 인해 출판사들의 수익 구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더구나 소득이 계속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한 번 읽고 버릴 오락거리가 아닌 책들에 상당한 고액을 지불할 의향이 높아졌다. 체인형 대형 서점들이 소규모 독립 서점들을 시장에서 밀어내면서, 출판계는 대형 베스트셀러를 위주로 책을 팔아야 한다는 시장 논리에, 꾸준하지만 대박을 노리기는 힘든 중견 작가들의 작품들이 쉽사리 절판되는 위기를 맞는다. 그러니 서가에서 오랫동안 머물 뿐 아니라, 권당 수익률도 높은 하드커버를 낼 조건이 여러모로 갖춰진 셈이다.

이렇게 문고판에서 하드커버로 수요와 공급 모두가 이전해 가면서, SF 단편은 오히려 더욱 유리한 출판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스타일을 실험하는, 그래서 읽기에 더 큰 노력이 경주되는, 그러나 바쁜 현대인의 생활에서 자투리 시간을 투자하기에 적합한, 단편들은 이제 한 번 책으로 나오면 몇 년이고 열성적인 독자들이 사서 읽을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고(故) 제임스 터너(James Turner)가 시작한 Golden Gryphon 출판사에서 나오는 제임스 패트릭 켈리(James Patrick Kelly)나 토니 다니엘(Tony Daniel) 등의 주옥 같은 개인 단편집들과 「북 잉글랜드 과학소설 협회(NESFA)」에서 꾸준히 내고 있는 코드웨이너 스미스(Cordwainer Smith) 등의 개인 단편집들을 볼 때, (큰 돈을 바라기는 힘들지만) 소규모 출판으로도 충분히 게임이 되는 독특한 출판 행태는 하드커버의 전성기에 확고하게 정착된 듯하다. 그 이외에도 시어도어 스터전(Theodore Sturgeon)이나 할란 엘리슨(Harlan Ellison) 등의 단편 전집이 여러 권에 걸쳐 하드커버로 등장하는 현상 등은 좋은 작품을 훌륭한 판본으로 꾸준히 공급할 때, 독자들은 높은 책값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고 하겠다.

두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새로운 출판 환경 요인은 바로 인터넷의 등장이다. 독자들의 취향이 종이책에서 전자책(E-Book)으로 완전히 바뀌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쉽게 예측할 수 없으나, 적어도 SF계에서는 새로운 인터넷 환경에 발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독자에게 접근하려고 노력해왔다. 「Asimov’s Science Fiction」나 「Analog」와 같은 유서깊은 SF 잡지들은 이미 온라인 상으로 구독신청을 할 수 있으며, 「Locus」나 「Science Fiction Chronicle」과 같은 전문 소식지(Newszine)들은 방대한 과거 자료를 전산화하여 독자들에게 서비스하고 있다.

또한 아예 종이가 아닌 온라인 상으로 독자들에게 접근하는 방식도 끝없이 계속 실험중인 상태이다. 「Omni」, 「Event Horizon」, 「Infinite Matrix」, 「Tomorrow’s SF」와 같은 웹진들은 결국 실험에 실패한 채 단명에 그쳤으나, 영국의 「Infinity Plus」나 「Science Fiction Weekly」 등과 같은 웹진들은 꾸준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웹진들은 다양한 리뷰 기사나 뉴스 정보는 물론이거니와, 신진 및 중견 작가들의 수준 높은 단편들을 독자들에게 온라인 상으로 무료로 제공함으로써, 아직 불확실하기만 한 장래의 온라인 출판에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있다.

맺으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SF에서 단편이 얼마나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배후에는 어떤 요인들이 숨어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어떤 이는 현재 미국 전체에서 매년 발표되는 단편 중에서 거의 40~50퍼센트가 SF나 판타지 쪽에 속한다고까지 본다. 이 말은 뒤집어 얘기하면 소위 순수문학 또는 주류문학이라는 곳이 더 이상 실험과 도전의 무대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New Yorker」나 「Paris Review」와 같은 문학성을 중시하는 잡지들은 작품 하나 싣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게 되었고, 이는 신진 작가들이 추구하는 작품의 질을 높이는 데 일정 정도 도움이 되기도 했으나, 그만큼 새로운 목소리, 새로운 얼굴을 더욱 자주 소개하는 데 실패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미있는 독서 경험과 훌륭한 글쓰기가 자꾸 나뉘는 추세에서, 독자들은 단편에서 점차 멀어져가기만 한다. 이러한 추세는 장기적으로 볼 때, 순수문학이건 장르문학이건 가리지 않고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싱싱한 붉은 피가 끝없이 수혈되지 않을 때, 남는 것은 쭈글쭈글한 피부에 골다공증에 걸린 앙상한 노인의 몸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SF계에서는 아직 그러한 위험한 징조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잡지 시대로부터 문고판 단행본을 거쳐 하드커버와 인터넷 시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도전과 실험에 한 번도 주저하지 않아왔던 SF는 여전히 단편을 통해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한창 해외 SF 작품들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었을 때, 『듄(Dune)』등의 대하 시리즈물이 기껏해야 중간치기, 거의 대부분이 폭삭 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원의 『세계 SF 걸작선』이나 도솔의 『세계 SF 걸작선』 및 『세계 휴먼 SF 걸작선』, 여성사의 『여성 SF 걸작선』등은 상당히 선전했다는 후문이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볼 때, 장편보다 읽는 데 시간이 적게 걸릴지는 모르나 읽기에 결코 더 쉽지는 않은 단편이 주는 도전에, 우리 나라 SF독자들 역시 훨씬 더 열린 자세를 보인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해외의 SF 걸작들을 꾸준히 번역 소개하는 일과 병행하여, 아마추어 작가들이 단편을 위주로 실력을 연마하고 새로운 시각을 선보일 수 있는 자리를 더욱 자주 마련하는 일은, 한국의 SF 발전을 위해서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날로 열악해져가는 국내 출판 환경을 고려할 때에,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출판 매체의 계발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경우, 「이매진」이나 「정크 SF」와 같은 곳에서 창작 및 번역 단편을 통해 기존 독자를 계속 확보하고, 신진 독자들을 SF라는 ‘멋진 신세계’에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결코 그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매진 칼럼 – 과학소설을 읽는 사람들 (7)

(2001년 09월 01일)

출처: 홍인기 씨 블로그 [The 3rd E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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