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윗 갈무리] 일베, 역설적 전위

잉여와 오타쿠를 넘어서에 이어 적은 두 트윗타래 정리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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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현재가 심오한 의도와 안정된 필연성에 의거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역사가들에게 이에 관해 우리를 설득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 감각은 우리가 기원적 지표도 좌표도 없이 무수히 많게 잃어버린 사건들 속에 산다는 것을 인정한다.” – 미셸 푸코, [니체, 계보학, 역사]

01. 계몽(주의)의 극한을 알리는 나팔수

“이 학생의 주장에서 만나게 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정치에 냉소적인 것이 문제였다.” – 엄기호, 20대는 왜 투표하지 않게 되었나

“그러나 오히려 일베는 이런 보수·진보 또는 좌·우의 피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문순표, ‘진격의 엘리트’인가, 게토에 갇힌 넷난민인가?

“한마디로 일베가 계몽주의의 극우적 변종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 에오, 재난 이후의 계몽주의와 광신주의

한윤형의 책에 대한 박상준선생의 독해는 일베가 계몽주의 담론 이후, 아니 그것의 내파(implosion)에 해당한다는 내 생각-과 이에 대한 에오님의 동의-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 horschamp(@transdescendent)

엄기호 씨 글에서 ‘탁월함’의 예로 ‘웹툰’이 언급됐는데, 이는 물론 이말년을 위시한 ‘병맛 웹툰’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김수환 씨의 [웹툰에 나타난 세대의 감성구조: 잉여에서 병맛까지]와 같은 논지.(김수환 씨의 글은 책 [속물과 잉여]에도 실려있다.) 그러나 이후 [미생]의 등장으로 상황은 일변한다.

“적어도 <미생>의 경우엔 국민 웹툰이라는 수식어가 과장된 수사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다르게 말해, 적어도 이 작품 이후로는 웹툰 매체의 주변성이나 ‘세대론적’ 독자성을 말하기 어려워졌다.” – 김수환, <미생>이 판타지라고? 아니, ‘불가능한’ 성장 소설!

그리고 이것은 [미생]이 드라마화 되며 나타난 신드롬이 우여곡절 끝에 ‘장그래법‘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어느 정도 예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김수환 씨의 처음 글에서 병맛 웹툰은 “냉소와 유희의 힘”으로 다뤄진다. 여기서 한국의 잉여-주체와 일본의 오타쿠-주체를 비교하며, 그 차이를 “텍스트를 대하는 감정적 태도, 즉 ‘몰입 대 이화’로 갈리는 화용론적 태도”로 분석한다. 요약하자면 오타쿠-주체=데이터베이스 소비 주체(아즈마 히로키)=몰입이라면, 잉여-주체=이화, 즉 “온 힘을 다해 감정이입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이 “자기투영적 형태의 냉소”가 20대, 혹은 청년 세대의 언어로 말해지는 ‘탁월함’으로 여겨졌던 것. 그런데 ‘냉소’라는 키워드를 놓고 본다면 오타쿠 주체 역시 ‘시니시즘’의 적자다. “철저한 시니시즘의 자세“야말로 오타쿠의 특징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들은 “무관심하고 무의미해보이는 것에 몰두”한다.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오타쿠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의미 있는 것에는 무관심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 몰두”하며, 동시에 “자신의 관심 영역에 속하는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심한 냉소적 반응을 보이며 거리를 두는 태도를 취하는 점”. 아즈마 히로키 역시 유사하게 말한다. “90년대의 오타쿠계 문화를 특징짓는 ‘캐릭터 모에’란 사실 오타쿠 자신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단순한 감정 이입이 아니라 (…)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상대화하는 기묘하게 냉정한 측면이 감추어져 있다.”

오타쿠와 잉여를 가르는 “몰입과 이화”라는 구분법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다. 그러나 기실 김수환이 참고한 아즈마 히로키부터가 (아즈마 히로키가 참고한 오사와 마사치를 이어받아) 오타쿠-주체가 단순한 “몰입”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타쿠적인 이야기 소비=허구 중시는 “소비사회적 냉소주의가 철저화된 형태”인 것이다. 즉 “내셔널리즘적으로 회수당하는 함정 (…) 그 함정으로부터의 감성적 반발이야말로 오타쿠의 실존적 출발점“이었던 것이고, 그것이 ‘반발’로 작용하길 그만두고 역으로 기존 체제에 회수당하는 것이 현상황(“현재의 오타쿠들은 정치적으로 무해한 사람이 되려 하지만, 자신의 판단력이 없으면 특정한 입장의 대변자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 오쓰카 에이지)이다. 그렇다면 이때 오타쿠와의 대비를 통해서 극적으로 부각되는 잉여-주체에서 ‘탁월함’이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도 같이 허물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김수환 씨는 웹툰을 세대론적으로 논의하려는 것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미생에 관한 글 말미에서 여전히 (최태섭의 [잉여사회]를 경유해) ‘잉여-주체’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는다.

다소 막연해 보이는 이 기대감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라도 김수환 씨가 그다지 철저하게 분석해내지 못한 오타쿠와 잉여의 비교를 각각 따로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결론을 당겨말하자면 내가 보기에 “몰입과 이화”라는 키워드만 두고 볼 때 두 주체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 두 주체는 모두 일반적으로는 무의미해보이는 것에 이상할 정도로 몰입하며, 심지어 그것을 자기정체성(동일성)의 근원으로 삼는다. 동시에 그것과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그 간극을 향유한다. 이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태도이다. 다시 오사와 마사치를 끌어오면, 오타쿠의 몰입은 얼핏 가상으로의 도피(몰입과 이화 중 몰입)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현실로의 도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수환 씨의 오타쿠 분석은 결정적으로 실패(“병맛 웹툰은 오타쿠를 위한 라이트노벨이 될 수 없다” 운운)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 자연히 잉여에 대한 기대감 또한 다만 막연해질 수밖에 없다. “몰입과 이화”가 주체의 태도에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 김수환 씨의 주장이지만, 정작 논문에서 얘기되는 건 텍스트 그 자체다. 오타쿠가 보는 텍스트는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텍스트인 반면, 병맛 만화는 온 힘을 다해 감정이입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꾸로 잉여들이야말로 이화를 유도하는 작품에 몰입하고 열광하고 있는 것이고, 오타쿠는 그 반대로 몰입을 유도하는 작품을 두고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 다시 ‘현실로의 도피’라는 현상을 살펴보자. 몰입을 유도하는 작품 앞에서 이화 작용을 일으키던 오타쿠들이 아이러니의 간극을 상실하고 ‘현실로의 몰입’을 하는 반면, 애초부터 “일종의 좌절된 소비“주체였던 잉여들의 몰입은 ‘현실로의 몰입’으로 보기 힘들다.

‘현실로의 몰입’이란 달리 말해 ‘리얼리티에 대한 갈구’이다. 이것은 일본전후사라는 틀을 벗어나 자본주의의 무한성이라는 환상이 깨진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강제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는 한국에서도 맥락은 다를지언정 저성장 시대에 따른 성장 불가능성 테제 등으로 표현됐다. 즉, “체제로의 편입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시대의 문제다.

이때 한국에서 ‘리얼리티에 대한 갈구’는 일본과는 달리 애니메이션, 게임을 향한 몰입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 조선일보의 ‘달관세대’ 기사에 대한 반론들에서 드러났듯이, 한국과 일본 사회는 여기서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여러 평자가 지적했듯, “일본의 ‘사토리 세대’가 한국의 ‘달관 세대’로 오는 것은 현 시점에선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잉여들이 가상에 몰입할 때, 그 몰입은 불현듯 깨지고 현실의 방해를 받는다. 해방은 그저 순간에 불과하다. 실제로 잉여-주체는 여전히 편입을 욕망하는, 하지만 그것이 좌절된 주체이기 때문이다.(“여기 잉여 하나 추가요~” 그 다음은?!) 이는 편입을 욕망하지 않기를 선택한 사토리세대, 그리하여 방해받지 않고 한없이 해방적 순간들에 잠겨 우회적으로 체제에 회수당하는 오타쿠-주체와는 다른 지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오히려 현실로의 도피가 ‘성과주체’, 혹은 ‘자기계발 주체’라는 양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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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설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자기정체성(동일성)’의 문제로 돌아가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 자기계발 주체는 이미 허구성이 드러난 성장서사에 온 힘을 다해 몰입하며, 그를 통해 리얼리티를 붙든다.

먼저 현재의 상황을 차분히 따져보자. 엄기호의 진단에 따르면, 이제 우리는 ‘일관된 서사를 통한 주체의 구성이 불가능'([단속사회])해져버린 사회에 살고 있다. 이는 즉 주체의 자기동일성이 위태로워졌다는 것이며, “‘나’라는 주체의 인격적인 동일성이 의심받게“(오사와 마사치) 되었다는 뜻이다. 원인은 무엇인가? 타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꿰뚫어볼 수 없는 타자의 상실‘ – 한병철, [투명사회])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동일성이란 본래 초월적 타자와 내재적 타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초월적이어야만 하는 타자의 내재화에 따른 초월성의 붕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정체성에 대한 회의의 극한에서 ‘자기계발 주체‘(서동진)가 탄생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타쿠는 일상적인 현실 속의 자기동일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환상적 세계에서 새롭게 획득하고자 한다. 이런 시도가 원천적으로 차단당했을 때, 일상적인 현실 속의 자기동일성을 계속해서 추구하려는 헛된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자기동일성을 찾는다는 건 이제 협의의 현실에서도 비현실에서도 모두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관된 진술이라고 보면,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은 좌절되고 마는 것이다. 이때 발생하는 현상이 바로 현실에의 몰입으로, 오타쿠는 냉소적 거리감을 상실한 채 “신경계를 직접 자극하는 듯한 강렬함…자해행위 중독”과도 닮은 행위에 빠져든다.
이것은 자기계발 주체에게서도 발생하는 현상이다. “오늘날 우리는 완전히 소진(Burn Out) 될 때까지 병적 쾌감으로 일에 파묻힌다. 번아웃 증후군의 첫째 단계가 바로 병적 쾌감이다.”(한병철, [“친절마저 상품이 된 시대, 혁명은 없다”])

그 결과, “시간적으로 지속되어야 할 인격적인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주체가 어느 한순간 의사를 표명한다는 것의 의미조차 극히 지엽적인 사실로 전락하고 만다.”(오사와 마사치) 이는 곧 정치의 작동불능을 가리킨다.

다시 잉여-주체로 돌아가보자. 잉여는 상당히 아슬아슬한 존재이다. 이들은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가상 공간에서 체제에 편입되길 꿈꾸지만 동시에 그것이 좌절됐기 때문에 비현실에 유배된 상태이다. 이들은 딱히 원해서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우리는 디씨”라는 선언의 이면에 있는 불안“), 자기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다른 가능성으로 분출되어야 할 잠재태(에 불과하)다. 그 가능성이 부정적으로 실현된 것이 다름 아닌 일베라고 할 때, 어떻게 잉여가 일베가 되었는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자기동일성의 문제만 두고 볼 때, 일베는 일종의 전도된 ‘정체성 정치‘를 행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택광은 이것을 “현실을 지배하는 질서에 대한 거부라기보다 그 질서에 편입해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이라며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규정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반대로 일베는 바로 그 다음 지점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베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거나, 국가-아버지에 순응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일베는 편입의 욕망이 좌절된 지점에서 그것을 그 자체로 긍정하며 태어났다.

이들에게 모든 것은 ‘지엽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일베는 적극적으로 모든 초월론적 타자를 끌어내려 자신들과 동류인 내재적 타자, 특히 그 이상성을 상실하고 단지 모방가능성만을 간직한 “병신”으로 만들고자 한다. 일베의 행동 기제는 언제나 모든 것을 상대화의 지평 속에 내던진다는 것에 있다. 이들에게 초월적 타자란 언제든지 더럽혀질 수 있는 허약한 것에 불과하다. 심지어 인터넷 공간이란 협의의 비현실에 의탁해 벌어진 초월적 타자와 내재적 타자의 근접조우는 이제 현실에서도 무리없이 벌어질 수 있는 무언가에 불과하단 것이 폭식 투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런 의미에서 일베는 “속물의 정치“의 시대가 용해된 지점을 앞당겨 보여주는 중요한 참고자료이다. 이들은 말하자면 계몽의 극한=종언을 알리는 나팔수이며, 초월성의 추락을 위해 투구하는 역설적 전위다.

02. ~간주 중~

  • 01에서 말하려던 것 중 하나는 잉여는 그 자체로 주체가 아니라 다른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잠재태로서의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 그런데 이제 잉여가 바라는 그런 주체(“어제의 나와 같은 오늘의 나”)는 현실에서도 비현실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자는 자기계발 주체가 후자는 오타쿠가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불가능성을 ‘현실로의 도피’로 회피하거나 ‘사토리 세대’처럼 유예시킬 순 있겠지만, 일베는 그 모라토리엄기가 영원할 수 없단 것을 보여준다는 것. 모라토리엄기가 끝장나는 날, 거기선 당연히 “나만 아니면 돼”를 넘어, “내가 이렇게 됐으니 너도 당해봐라”는 ‘가학적 쾌락'(우치다 타츠루)에서 비롯된 ‘끌어내리기 민주주의'(마루야마 마사오), 극단적으로는 ‘리셋 욕망‘(엄기호)이 또아리를 틀게 된다. ‘리셋’의 가장 현실적인 버전은 물론 ‘저출산’ 따위가 아닌 전쟁이다. 혹은 보다 추상적인 버전으로서 “‘파국의 유물론’ 같은 유치찬란한 철학적 선언, 요설“(서동진).
  • [라쇼몽]의 라스트신에서 ‘선의’를 ‘악의’로 갈아끼운 일베. 누군가를 아무런 희망없이 증오하는 사람들. 초월적 타자를 온 힘을 다해 추락시키는 그들은 초월적 타자가 추락해 내재적 타자의 ‘이상성’이 붕괴하면 ‘모방(실현)가능성’도 사라진다는 것, 즉 내재적 타자도 따라서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지만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평등한 (시민/)병신“이 될 수 없고, 따라서 그런 ‘희망 없음’과 ‘(사랑/)증오’를 받아안고, “[타자]”와 마주쳐 그들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야한다. 희망없는 사랑, 곧 건강한 비관주의로서의 정치. “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발터 벤야민, [일방 통행로])

03. 서비스, 서비스!